양초가 있는 휘겔리한 밤들

요즘 내가 집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양초 켜기’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우연히 소품 가게에서 본 금빛 양초가 너무 예뻐,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했다. 흔들리는 양초 불빛을 바라보면 묘하게 집중이 된다. 전등보다 아날로그한 그 불빛에서 따뜻함을 느낀다.
그때부터 나는 줄곧 기분 전환을 위해 차분해지기 위해 자주 초를 켠다.
글. 이소영(소통하는 그림연구소-빅피쉬 대표, <그림은 위로다> 저자)
빌헬름 함메르쇠이 자화상 / 1911 / 캔버스에 유채 / 개인 소장
양초를 켜면 신기하게도 내 집의 뻔히 아는 모든 사물이 달라 보인다. 하얀 형광등 아래에서라면 무심하게 보였을 테이블 주위의 커피잔이라든가 의자, 저 멀리 창가의 화분들과 아무렇게나 어질러놓은 책같이 아주 낯익은 일상의 사물들이 초를 켜고 보면 묘하게 분위기가 있고 편안한 느낌을 선사한다. 드라마틱하거나 낭만적인 순간이 아니어도 양초 덕분에 나의 저녁도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양초를 켜는 문화는 일찍이 북유럽 사람들의 삶의 여유를 표현하는 문화였다. 북유럽에서 내가 가장 사고 싶었던 양초는 12월에 하루하루 녹아 줄어드는 12월 달력 초였는데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북유럽에는 나라마다 ‘아늑함, 따스함, 안락함’과 어울리는 단어가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코슬리’, 덴마크에서는 ‘휘게’가 그 예이다. 몇 년 전 인기 있던 책 <Hygge Life>의 저자이자 행복연구소 CEO인 마이크 비킹은 북유럽 국가들이 행복에 관한 조사에서 늘 선두를 달리고 있고, 그중 덴마크가 줄곧 1위를 하는 이유를 ‘휘게’에서 찾는다.
휘게는 복잡함보다는 간소함, 서두르는 것보다는 느린 것, 새것보다는 오래된 것, 자극적인 것보다는 은은한 것과 관련이 있다. 덴마크 사람들은 자주 ‘휘게’라는 단어와 ‘휘겔리하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노르웨이와 덴마크가 하나의 왕국인 시절에 생긴 ‘휘게’란 단어의 뜻은 ‘웰빙’과 닮아 있다. 포옹을 뜻하는 ‘Hug’라는 단어와 ‘받아들이다’의 의미인 ‘Hugge’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고, 분위기를 뜻하는 단어 Hurg에서 유래한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Hygga’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결국 ‘휘게’라는 단어는 ‘배려, 분위기, 위안, 포옹, 웰빙’ 등의 뜻을 다양하게 품고 있다 “휘겔리한 시간 보내세요”, “만나서 진심으로 휘게합니다”, “정말 휘겔리한 거실이군요”와 같이 ‘휘게’와 ‘휘겔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사용한다.
  • 다섯 남자의 초상화 / 캔버스에 유채 / 190x340cm / 1901 / 스톡홀름 틸스카 갤러리
  • 두 개의 양초가 있는 실내 / 캔버스에 유채
휘겔리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소품이 바로 ‘양초’다. 양초를 켜고 혼자만의 고요한 저녁 시간을 보내거나 소중한 사람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바로 덴마크 사람들이 추구하는 ‘휘게한 분위기‘며 ‘휘겔리한 시간’이다.
도대체 양초를 켜는 것이 무엇이 좋을까 혼자 고민하다가 아예 검색을 해보기로 했다. 양초가 나의 피로감을 덜어주고 안락함을 제공했던 것에는 나름 과학적인 이론이 있었다. 우리는 매일 전자 기기나 대기오염으로 인해 플러스 이온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이 플러스 이온들은 우리 눈에 피로감과 불쾌감을 준다. 하지만 양초를 켜면 마이너스 이온이 방출된다. 그래서 양초에서 나오는 마이너스 이온이 방 안으로 퍼지면 우리 주변에 널리 퍼진 플러스 이온을 중화시켜준다. 시각적인 색감과 양초가 데워주는 미세한 온도 덕분에 나는 매번 따뜻함을 느꼈던 것이다. 덴마크 화가들 중에서 양초가 있는 풍경을 그 누구보다 매력적으로 그린 화가가 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제법 팬층이 두터운 빌헬름 함메르쇠이(Vilhelm Hammershøi,1864-1916)다.
그는 늘 비슷한 실내 풍경을 그렸다. 이 실내 풍경화들은 1890년대 후반부터 그의 대표작이 된다. 작품의 배경은 코펜하겐의 스트란가데 30번지와 25번지인 집이었다. 스트란가데 30번지에서는 거의 10년을 살았고 25번지에선 세상을 떠나기 전 3년을 살았다. 함메르쇠이가 코펜하겐에 있는 자신의 집 안 풍경에 각도를 조금씩 바꿔 부인을 등장시켜 그린 그림은 자그마치 60점이 넘는다. 그는 자신의 집을 수차례 묘사했지만 모두 조금씩 다르다. 햇빛에 비친 집 안, 그림자가 비친 벽과 바닥들이 섬세하게 모두 달라 기묘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마치 하나의 카메라를 삼각대에 세워두고 시간에 따라 조금씩 각도를 틀어 사진을 찍듯이 표현한 것처럼 말이다.
그가 그린 대부분의 작품들이 자신의 누이였던 안나나 부인이었던 이다 또는 처남이자 화가 동료였던 페테르(Peter)가 혼자 등장한다면 앞 페이지의 작품은 여러 명의 남자가 양초를 켠 실내에 앉아 있다. 바로 함메르쇠이의 동생인 스벤트, 화가의 친구인 건축가였던 토르발트 빈데스뵐 미술사가 칼 마드센, 화가 옌스 페르디난드 뷜룸젠과 칼 홀소에다. 남자들이 모인 저녁의 티타임이라고 하면 딱딱해 보이기 마련인데 그들을 감싸주는 양초가 있어 분위기가 단란해졌다. 화가를 바라보는 세 명의 예술가의 눈빛이 너무도 진지해 피식 하고 웃음이 난다. 함메르쇠이의 그림에 유독 회색을 비롯한 무채색이 많은 이유는 그가 좋아했던 기법이 그리자이유(grisaille)였기 때문이다. 그리자이유는 회색조의 색채만을 사용해 그 명암과 농담으로 그리는 화법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이 기법을 완성하기 전 모델링 때 많이 활용했는데, 무채색의 톤으로 칠하다 보니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다. 실제 함메르쇠이는 프랑스 파리에 머물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즐겼는데, 그의 마음을 현혹시킨 것은 그 어떤 명화도 아닌 고대의 돌조각이었다. 그는 고대의 석판화 부조에 온통 정신이 나가 그것을 그리며 회색 톤의 명암을 연습했다고 한다. 이 일화를 듣고 함메르쇠이의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회색의 명암 톤을 사랑했는지 더 잘 느껴진다.
눈이 오는 풍경 / 캔버스에 유채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석고 정물 수채화를 그릴 때 바로 채색을 하지 않고, 어느 정도까지 붓으로 데생처럼 무채색만 묘사를 해 톤을 쌓는데 그런 기법과 과정이 흡사하다. 가끔 무채색의 톤쌓기를 무척 잘하는 친구들은 마무리 때 거의 색을 입히지 않아도 매우 완성도가 높아보였다.
“나는 그의 작품과 내면의 대화를 나누는 것을 멈춘 적이 없다”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가 함메르쇠이의 작품을 보고 한 말이다. 함메르쇠이가 세상을 떠난 후 한동안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렇게 잊혀지던 화가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순회 전시회를 통해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고 ‘북유럽의 베르메르’라는 별명으로 고요하고 신비감이 감도는 그의 실내 풍경은 여전히 시간이 흘러도 우리를 사색하게 한다.
“옛날에 꿈에서도 잊어버린 아주 옛날에, 촛불의 불꽃은 현자들을 사색하게 했던 것이다. 그것은 고독한 철학자들에게 많은 몽상을 주었다. 철학자의 책상 위, 스스로의 형태 속에 사로잡혀 있는 물건들, 천천히 가르쳐주는 책들 옆에서 촛불의 불꽃은 끝없는 사상을 불러일으켰고 끝없는 오마주를 발생시켰다.”
함메르쇠이가 그린 양초가 있는 실내 풍경을 보며 오래전 읽고 메모해놓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 <촛불의 미학>의 구절이 떠올랐다. 양초의 촛불은 고독한 철학자뿐 아니라 바쁜 현대인들에게도 몽상의 기회를 준다. 고층 빌딩이 가득하고, 휴대폰이 쉴 틈 없이 울리고, 온종일 북적거리는 공간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면 나는 어김없이 양초를 켠다. 그러면 놀랍게도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그림 속 고요한 공간이 내게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나는 여전히 매일 밤 양초의 마법에 빠진다. 어느덧 겨울이다. 바깥 온도는 늘 냉장고 같아도 마음 한편은 양초처럼 따뜻한 겨울이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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