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구원한 천혜의 식품
감자

오래전 안데스산맥의 땅 밑에 숨어 있던 감자가 유럽을 거쳐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세상 곳곳에 전해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오해와 편견의 세월도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 와 있다. 정직한 뿌리를 내리고 순박한 꿈을 안은 채.
글. 에스더(푸드 칼럼니스트)
점심 무렵, 서울 도심 복판의 한 카레집을 찾았다. 북적이는 테이블 사이로 단정하게 세팅된 카레 한 접시가 내 앞에 놓인다. 진노랑색의 카레 소스 아래 큼직하게 썰어놓은 감자 한 무더기가 눈길을 끈다. 숟가락으로 조심스레 감자를 반으로 가르니 감자의 흰 속살 위로 뽀얀 김이 올라온다. 감자 위에 카레 소스를 풍성하게 얹어 한 입 맛본다. 알싸한 카레 향에 부드러운 감자의 담백함이 입안에 감긴다. 카레를 먹으러 간 것인지 그보다 풍성했던 감자를 먹으러 간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날 감자의 맛은 그 어느 날보다 특별했다. 싱겁지도 달지도 짜지도 않은 담담한 중용의 맛을 지닌 감자는 그래서 인류 전쟁의 발단이 되었을까. 감자는 침묵하는데 인간은 감자를 두고 서로에게 날을 세워 세계사를 뒤흔들었다.
세계 전쟁에서 가치를 드러낸 감자
대부분의 전쟁이 알고 보면 잘 먹고 잘 살자고 일어난다.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들은 말할 것도 없다. 1756년부터 1763년까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전쟁은 ‘감자 전쟁’으로 유명하다. 당시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감자의 효용 가치를 알고 농가마다 감자를 심게 했고, 자신도 감자를 주식으로 삼는 등 감자 생산을 장려했다. 식량난을 극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7년 전쟁에서 식량 부족과 오스트리아군의 군사력에 밀려 지구전으로 대처했다. 끈질기게 버텼지만 프러시아의 상황은 최악이라 할 만큼 불리했다. 하지만 적의 주요 식량인 감자를 차단해 병사들을 굶주리게 하는 작전으로 기적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식량이 떨어져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전쟁을 포기했다. 1789년부터 1814년까지 나폴레옹 전쟁 시절,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 여파로 많은 영국인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감자를 터부시하던 귀족, 왕족들에게 감자의 중요성을 알린 이가 루이 15세의 신하이자 학자였던 앙투안 오귀스텡 파르망티에다. 그는 감자가 영양학적으로 얼마나 우수한지를 알리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노력은 결국 프랑스의 감자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특히 빵의 재료인 밀의 가격은 전쟁이 지속될수록 천정부지로 올랐다. 밀을 먹을 수 없게 되자 영국인들은 감자로 눈을 돌렸다. 당시 영국인들은 감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가격이 싸고 영양가도 높은 감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감자가 영국의 주요 주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2차 대전 때도 감자는 귀중한 전쟁 식량 역할을 했다. 미국 병사들은 독일 병사들의 식량원이었던 감자밭을 습격해 초토화하는 작전으로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독일의 패망 원인 중 하나가 감자라고 주장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중요한 식량 가치와 전쟁 속에서 감자가 핵(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신대륙에서 온 신의 혜택, 감자
독일의 작가 괴테는 ‘신대륙에서 온 것 중 악마의 저주와 신의 혜택이 있는데 전자는 담배요, 후자는 감자’라고 했다. 서양인들이 즐겨 먹던 감자가 우리나라에 등장한 것은 1832년 독일의 구츠라프라는 선교사에 의해서다. 그러나 조선은 외국 작물은 국법으로 금하여 모조리 뽑아버렸고 이후 사람들은 몰래 재배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학자 이규경이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청나라 사람들이 산삼을 캐기 위해 숨어들어와 감자를 몰래 식량으로 경작한 것이 시초라고 전한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이다. 약 7000년 전, 페루 남부에서 재배되기 시작해 16세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전 세계로 퍼졌다. 감자의 어원은 ‘북방에서 온 고구마’라는 뜻의 북방감저(北方甘藷)에서 유래되었다. 감자의 영어 이름인 포테이토(Potato)의 어원도 고구마를 벗어날 수 없다. 고대 페루에서는 감자를 파파(Papa)라고 불렀다. 감자가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파파가 파타타(Patata)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듯 이름이 파타타로 바뀌게 된 것은 유럽인들이 캐러비안 지역에서 가져간 바타타(Batata, 고구마)와 비슷한 감자를 파타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 파타타가 지금의 포테이토란 이름으로 정착했다.
빈센트 반 고흐 ‘감자를 먹는 사람들’
예술 작품 속 감자 이야기
전 세계인의 주식이요, 간식인 감자는 예술 속으로 들어와 문화의 꽃을 피운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식품이기도 했던 감자는 특히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 밀레의 ‘감자 심는 사람들’, ‘만종’, 앨런의 ‘감자 줍는 사람들’에서 그 빛을 발한다. 구황작물인 감자는 국내 작품에도 시대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김동인의 소설 <감자>, 권태웅의 동요 ‘감자꽃’ 등이 대표적이며 안수길의 장편소설 <북간도>에도 감자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이나 동요에서 감자는 일제강점기의 비참한 조선 민중의 생활상과 함께 조국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그려진다.
감자 요리를 예술로 바꾼 프랑스에도 한때 감자를 그저 서민들이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천한 음식이라고 치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감자를 터부시하던 귀족, 왕족들에게 감자의 중요성을 알린 이가 바로 프랑스의 감자 전도사, 루이 15세의 신하이자 학자였던 앙투안 오귀스텡 파르망티에(Antonic Augustine Permentire)다. 그는 감자가 영양학적으로 얼마나 우수한지를 알리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노력은 결국 프랑스의 감자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고, 그의 이름을 딴 프랑스 대표 음식 ‘파르망티에’로 그는 음식 예술사에 남게 된다. 감자의 아름다운 푸른 꽃은 프랑스 마리 앙투와네트 왕비가 머리 장식용으로 애용했다. 땅속의 사과, 감자 한 알의 숨어 있는 힘은 이렇게 역사를 재조명하고 인류를 구원했으며 지금도 우리 식탁에서 담백하고 깊이 있는 맛을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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