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환상, 일과 여가의 균형
<달과 6펜스>

당신이 돌아오면 아파트는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을 것이오. (…) 그러나 내가 집에서 당신과 아이들을 맞아들일 수는 없소.
이미 당신과는 별거할 결심으로 내일 아침 파리로 떠날 예정이니까. 이 편지는 내가 파리에 도착한 뒤 보내기로 하겠소.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오. 이 결의는 절대 바꿀 수 없소.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글. 안상헌(Meaning독서경영연구소장) / 일러스트. 이혜헌
평범한 직장인이 아내와 아이들을 남기고 사라졌다. 남긴 것은 편지 한 통뿐. 어디로 갔는지, 왜 떠났는지 이유도 알리지 않았다. 바람이 난 걸까? 일확천금이라도 생긴 걸까? 편지를 본 아내가 그를 찾아 나선 것은 당연했다. 그는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를 찾아낸 곳은 파리의 허름한 여관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오직 한 곳에만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림이었다.
서른다섯, 다른 삶을 시작하다
영국 출신의 작가 서머싯 몸의 작품 <달과 6펜스>는 잘나가던 중년의 한 남자가 예술혼에 사로잡혀 집을 나서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림에 빠져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 남자는 가족을 버리고 생계도 무시하며 오직 그림에 전념한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꿈을 향해 가는 저돌적인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그 인물은 후기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인 폴 고갱이다. 폴 고갱은 증권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고갱은 증권시장이 붕괴되면서 어쩔 수 없이 직장을 잃을 상황에 놓인다. 그에게는 아내와 다섯 명의 아이가 있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그는 평소에 관심이 있던 화가가 되기로 하고 새로운 세계로 뛰어든다. 서른다섯이라는 늦은 나에게 시작한 그림이었지만 꿈꾸는 삶이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 나이 35세, 그때 나는 증권회사의 회계원이었다. 그러나 나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붓을 들었다. 그것은 결코 늦은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는 일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얼마나 끈기로 이어갔나 하는 사실뿐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삶
소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와 폴 고갱은 늦은 나이에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이 꿈꾸던 일이었고 간절히 살아보고픈 삶이었다. 우리도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에 뛰어들었다는 사람들의 소식을 종종 듣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부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함을 경험한다. 하고 싶은 일에 뛰어든 그들의 용기와 삶을 부러운 눈으로 보면서도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작용하는 탓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만 없다면 나도 그들처럼 언제든 꿈꾸는 일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자기답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모두 한가지가 아니던가. 그 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이 그들을 괴롭혔고 그림은 제 빛깔을 드러내지 않았다. 폴 고갱의 경우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내와의 관계가 나빠졌고 처가에 신세를 져야 했으며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일도 빈번했다. 힘들게 그린 작품들도 주목을 받지 못했고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엄청난 좌절을 안겨주었다. 소설의 주인공 또한 수많은 어려움을 그림에 대한 애정으로 견디는 힘든 생활이 반복된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은 너무도 매력적이다. 무엇을 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삶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쓴 그들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유!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행복한 삶이 아니던가.
‘달과 6펜스’의 세계
왜 하필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이 붙여졌을까? 달이나 6펜스에 대한 이야기는 책 속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제목이 붙여진 것은 달과 6펜스가 상징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달과 6펜스 모두 둥글고 빛난다. 모양이 비슷하고 빛난다는 점에서 같지만 둘이 뜻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6펜스는 동전이다. 한마디로 돈이다. 돈은 현실에서 필수적이다. 직장인이 출근하는 이유 중 하나인 돈 때문이고, 새로운 일에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6펜스는 경제적 관념이 중요시되는 현실을 의미한다. 반면 달은 낭만적인 세계다. 영혼과 예술과 삶의 의미를 담고 있다. 찰스 스트릭랜드와 폴 고갱은 6펜스의 세계에 지쳐 달의 세계로 뛰어든 인물들이다. 책 속에서 주인공은 달의 세계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예술혼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6펜스의 세계에 살면서 항상 달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달과 6펜스>라는 책이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사람이 동경하는 세계, 한 번쯤 꿈꾸는 일탈의 삶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렇다고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책 속의 삶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힘겹기 때문이다. 달의 세계에 뛰어든다고 해도 그곳에 자유와 행복만 있지 않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픔과 고통이 없는 세계는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여가는 일을 위한 창조적 에너지
인간은 대립되는 개념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낮과 밤, 남과 여, 기쁨과 슬픔 등 상반되는 것은 다른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달과 6펜스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달의 세계만 존재할 수 없고 6펜스의 세계만 있을 수도 없다. 6펜스의 힘겨움이 있기에 달의 세계를 동경하고, 달의 세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6펜스의 세계가 소중하다. 고달픈 일상은 환상적인 삶을 꿈꾸게 하지만 환상적인 삶이란 애초에 없다. 고단한 일상이 만들어낸 것이 환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현실,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달의 세계에 뛰어든다고 해도 그 세계는 곧 6펜스의 세계로 변해버린다. 폴 고갱이 꿈꾸던 화가로서의 삶도 그림을 팔지 못하면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없는 6펜스와 다르지 않았다. 달의 세계는 환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것이 균형이다. 일상과 환상, 일과 여가의 균형. 지나치게 일에 집착하면 삶이 메마르기 쉽다. 삶이 메마르면 여유를 잃게 되고 상상력이나 창의성을 상실해서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당연히 일의 능률도 떨어진다. 현대사회는 노동시간이 생산성과 직결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방식은 더 위험할 수 있다. 일과 일상에 매몰되기보다는 여가 혹은 환상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여가를 즐기고 현실의 힘겨움을 중화시킬 낭만적 경험을 가질 때 일상을 치고 나갈 힘이 생긴다. 퇴근 후 혹은 주말을 이용해 좋아하는 취미를 즐기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창조적 여가는 생산적 일을 위한 에너지를 생성한다. 여가에서 일의 아이디어를 얻거나 일의 의미를 재발견하기 때문이다. ‘잘 쉬어야 한다’는 말은 이런 의미다.
반복되는 일상 속 균형 잡기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에 도착하고 그곳의 분위기에 동화된다. 그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며 원주민 여자 아타와 결혼하며 일시적 행복을 맛본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한센병이라는 불행이 그를 찾아온다. 병으로 죽어가던 그는 마지막 예술혼을 다해 오두막집의 벽에 그림을 그린다. 그 벽화를 마지막으로 그의 불같은 삶은 종말을 고하고 유언에 따라 오두막과 그림은 불에 타 한 줌의 재로 사라진다. 낭만과 예술의 세계로 뛰어든 주인공의 삶이 행복하지만은 않다. 달의 세계에서도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일과 여가, 일상과 환상의 균형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직업 만족도 조사 결과를 보면 예술가들은 자신의 일과 삶에 높은 만족도를 보인다. 왜 그럴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힘이다. 예술가들은 일상의 작은 변화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독특한 힘을 가졌다. 화가들은 사물의 작은 차이를 발견해내고 그 차이를 그림으로 표현한다. 같은 꽃처럼 보이는 것도 자세히 보면 모두 다르다. 같은 해를 봐도 어제의 것과 오늘의 그것은 다르다. 이런 차이를 발견하는 섬세한 눈이야말로 화가들의 자질이다. 차이의 발견은 곧 의미와 깨달음을 가져오고 삶을 괜찮은 것으로 느끼게 한다.
우리 일상은 반복적이다. 같은 일을 반복하고 매일 만나는 사람을 다시 만난다. 이런 일상의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 주말이면 여가를 떠난다. 여가가 즐거운 것은 일상과 다른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한 여가가 반복되면 이것 또한 일상처럼 무미건조해진다. 상황이 이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반복되는 하루에서 다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고갱을 인상파라고 부른다. 인상파 화가들은 빛에 따라 달라지는 사물의 색채 변화에 민감했고 그 변화를 통해 자연과 사물을 묘사했다. 아침에 보는 해와 낮에 보는 해는 다르다. 이것은 빛과 색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고 그 변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가다온다. 인상파 화가들이 강렬한 색채를 강조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고갱 또한 타히티 원주민들의 모습과 삶을 독특한 색채로 그려내며 자신만의 색을 완성한다.
빛나는 일상을 위하여
<달과 6펜스>는 예술혼에 사로잡혀 달의 세계로 뛰어든 한 남자의 일생을 추적하고 있다. 우리도 고달픈 일상을 떠나 낭만적인 삶을 꿈꾸지만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영원한 행복도 줄 수 없다. 이것을 아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일상이든 여가든 그 속에서 작은 의미와 깨달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듯 오늘과 내일은 다르다. 어제 만난 동료와 오늘의 그도 다르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일의 상황과 의미는 어제와 같지 않다. 그 작은 차이를 발견하는 디테일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일상은 지루함이 아닌 황홀함이 될 수 있다. 방법은 단순하다. 어제와 다른 눈으로 오늘을 보는 것이다. 오늘 보는 동료는 어제와 다른 모습이다. 눈빛이 변했고 말의 내용도 다르다. 그럼에도 비슷하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의 스타일과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익숙하기에 안다고 착각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나태주 시인은 우리가 일상을 자세히 보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대충 보고 다 봤다고 착각하는 것이 우리다. 자세히 보면 다르다. 다름은 새로움을 준다. 새로움은 사랑스럽다. 매일 대하는 일과 사람이 사랑스럽다면 이보다 좋은 삶은 없을 것이다. 균형 잡히고 아름다운 삶의 비밀을 이제 알겠다. ‘자세히 다르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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