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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 모여 인생이 된다

보이후드

우리는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할까? 액션영화나 공포영화를 볼 때의 짜릿한 느낌, 혹은 로맨스영화를 볼 때의 달콤한 대리 만족일까?
아니면 예술영화를 볼 때의 깊은 감성이나 영감, 또는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영화에서의 교훈이나 깨달음일까?
영화 <보이후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본 어느 영화에도 속해 있지 않은 특별한 영화다.
글. 김은경(시인, <영화의 심장소리> 저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룬 영화를 찍고 싶던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6살의 소년을 캐스팅해서 특별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6살에서 18살까지 12년에 걸쳐 해마다 일정한 분량의 영상을 찍는 것이다. 그는 <비포 선라이즈>를 비롯한 ‘비포’ 시리즈의 배우인 에단 호크와 함께 이 특별한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를, 같은 배우를 써서 그렇게 오랫동안 찍은 경우는 없었다. 찬사를 받았던 링클레이터 감독의 또 다른 작품 ‘비포’ 시리즈가 흡사하긴 하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각각 20대, 30대, 40대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9년마다 한 번씩 찍었다고 한다. 배우와 극 중 인물의 나이를 똑같이 설정한 것이 가장 흥미롭다. <비포 선라이즈>에는 비엔나를 배경으로 풋풋한 20대의 사랑, <비포 선셋>은 파리에서 30대의 성숙한 모습, <비포 미드나잇>은 그리스를 배경으로, 사랑하지만 일상에 찌든 채 싸움으로 지쳐가는 중년의 모습을 담았다.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영상을 지켜보는 것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평범해서 더 특별한 가족 이야기
<보이후드>는 6살 소년 메이슨이 18살이 되어 부모의 품을 떠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한 소년의 일상을 담은 영화지만, 영화라기에는 드라마틱한 사건이 별로 없다. 미국이라는 배경에서 오는 문화적 차이가 있을 뿐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다. 하지만 160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배우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시간이 펼치는 일종의 마법 같다. 마치 하나의 씨앗이 순식간에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고속 촬영 영상을 보는 것 같다.
한 소년의 성장기인 동시에 가족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보이후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것이다. 청년이 된 메이슨이 대학에 가기 위해 집을 떠난다. 짐을 싸는 아들을 지켜보던 엄마는, 아들이 너무 신나 한다며 화를 낸다. 싱글맘으로 두 아이를 키우며 치열하게 살아온 엄마다. 이제 남은 건 장례식뿐이라던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나는 인생에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앞만 보고 치열하게 달려온 한 인생의 고백인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대학 오리엔테이션 날, 메이슨은 처음 만난 친구들과 하이킹을 간다. 그들이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을 때 친구가 말한다. “이런 순간을 붙잡고 싶다 말하지만, 실은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거야.” 그러자 메이슨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시간이란 영원한 것이고, 붙잡을 수 있는 순간이란 건 바로 ‘지금’이라는 시간뿐”이라고. 그 순간 영화는 끝이 난다. 청년이 된 메이슨의 앞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
개봉관에서 이 영화를 봤을 때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새 다 커버린 아들의 엄마로서 지나간 세월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꿈처럼 흘러가버린 시간들, 아이를 지켜보며 울고 웃던 시간, 그 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들의 하교 시간이 늦어져 애태우던 때, 처음 연극 발표회를 하던 모습, 이사 온 첫날, 첫 운동회, 첫 반성문을 쓴 날, 아들이 처음 엄마의 ‘뽀뽀’를 거부하던 때(영화속 메이슨처럼)…. 아들을 키우는 것은 딸을 키우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생각해보면 엄마로서 후회의 순간이 더 많은데, 어느새 아들은 청년이 되어버렸다. 아주 오랜만에 가족이 모였다. 청년이 된 두 아이가 집을 떠난 후로 네 식구가 함께 무엇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아이들은 집에 오면 주로 집에서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며 뒹굴고 싶어 한다. ‘집밥’을 먹으며 쉬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좀 특별했다. 함께 전시장을 가고,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술상을 곁들인 저녁밥을 먹었다. 안주는 어릴 적 함께 한 추억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지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서로에게 준 상처까지 떠올리며 미안하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행복했던 그날의 추억은 함께 걷다가 찍은 네 개의 그림자 사진으로 저장되어 있다. 바라건대 영원히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사랑했던 기억, 소중했던 추억들을 쉽사리 잊는다. 상처는 오래 잊지 못한 채 쌓아놓고 분노하면서.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에서처럼 서로를 그토록 애틋하게 그리워하던 연인들이 결혼을 하고 나면 치열하게 싸운다는 걸 <비포 미드나잇>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랑이 이루어지고 나면 사랑했던 기억을 어찌 그리도 쉽게 잊을까.
사랑하기는 너무 어렵고 싸움은 너무 쉽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토록 애틋하게 사랑했던 이와 그리도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비포 미드나잇>은 우리의 거울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은 사랑하고 살기에도 너무 짧은 것을.
‘비포’ 시리즈의 배우 에단 호크는 <보이후드>에서 메이슨의 아빠로 출연한다. 에단 호크는 메이슨에게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자신이, 이혼한 전 부인인 메이슨의 엄마가 그토록 바라던 ‘범생이’가 되어 있노라고. 진작 왜 그렇게 되지 못했던가 하는 회한이 묻어난다. 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작가 켄 가이어는 말했다. “삶에서 놓쳐버린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난 걸음을 늦추기로 했다. 그런 순간들이 찾아올 때 알아볼 수 있도록.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다. 인생은 너무 짧다. 그리고 너무 성스럽다.”

바쁜 일정 속에서 헉헉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듯 뒤돌아본 순간이 있었다. 일정이 꼬여 어쩔 수 없이 멈춘 시간이었다. 나도 남들처럼, 영화 속 메이슨의 엄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여버린 일정 속에서 나는 불안해하거나 조급했으면 알지 못했을 ‘쉼’을 누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렇게 바쁘게 살다가는 정작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 거란 것을. 오래된 나의 꿈은 바쁘고 유능한 삶이 아니라, 사람끼리 소통하며 마음을 나누며 사는 삶이란 것을. 잠시 멈춰서니 그렇게 내면의 소리가 들렸다.
바쁜 일상 속에 함몰되지 않고 나의 마음을 지키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 그것만이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일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한 것이며, 그런 순간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청년 메이슨’의 말대로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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