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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세계로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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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시계가 멈춘 땅,
그곳의 바다

Cuba

어린 시절부터 쿠바가 궁금했다. 반공의 정서가 엄중했던 시절, 내 작은 머릿속에 그려진 ‘쿠바’라는 나라의 이미지는 작고, 조악하고, 어두침침하고,
어딘지 비밀스러웠다. 모두 미국을 좋아하는데 저 나라는 도대체 왜 미사일로 미국을 위협하려고 했을까? 머리가 커가면서 쿠바에 대한 궁금증은 막연한
호기심을 넘어 미지의 로망이 되었다. 혁명으로 건설한 나라, 세계 패권 국가 미국의 경제 봉쇄를 감당해낸 나라, 의사도 공무원도 농부도 교사도
모두 똑같은 월급을 받는 나라, 전 국민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실행하고 있는 나라. 오랜 세월 마음속 버킷 리스트로
꽁꽁 싸매두었던 소망을 꺼냈다. “쿠바에 가야겠어!”
글. 손경수(< 위대한 쿠바, 잃어버린 시간의 향연> 저자) / 사진. 손경수, 게티이미지
나는 배낭 하나를 둘러메고 전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자도 아니고 남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를 먼저 밟아보겠노라고 도전하는 탐험가도 아니다. 평범하다 못해 다달이 아등바등 밥벌이를 감당해야 하고, 제대로 할 줄은 모르나 매일매일 집안일을 해결해야 하고, 심지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대한민국 워킹맘이다.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 삶의 ‘Pause’ 버튼을 누르고 아무 연고 없는 지구 반대편 땅에서 홀로 한 달간 체류한다는 것은 좋은 말로 표현하면 ‘도전’이고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단절 속으로 들어가는 ‘무모함’일 것이다.
단절과 열림의 조우
쿠바에서 지낸 한 달은 오롯이 단절된 시간이었다. ‘빨리빨리’를 외치며 살았던 ‘일상’과의 단절.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으며, 어때야 하는지 하는 ‘의무’와의 단절. 낡고 더러워지면 그냥 폐기하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버리는 ‘첨단 자본’과의 단절. ‘단절’이라는 단어는 폐쇄성을 품고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이전 세계와의 단절과 함께 내 육신이 딛고 서 있는 땅을 향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쿠바는 1962년 미국에 의해 수출입이 통제되고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면서 가난한 나라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만들어진 자동차를 고치고 또 고쳐서 사용한 덕분에 오늘날 클래식 올드카의 전시장이 되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쿠바 사람들은 무슨 물건이든 고치고 고쳐서 오래오래 사용한다. 조미료와 향신료, 소스류도 거의 발달해 있지 않고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나 농약 따위의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 그대로의 것들이 식자재로 쓰인다. 쿠바에서 겪는 단절은 나름 ‘좋은 것들’이다. 쿠바인들은 언제든 기꺼이 춤을 추고 노래한다. 고된 노동의 하루를 마감하며 춤과 노래로 지친 삶을 위로한 쿠바인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졌던 가혹한 삶과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비극에 잠기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을 선택한 것이다. 느리지만 깊고 진하게 삶을 살아가는 자세, 그것이 쿠바의 정신이다.
춤추는 파도는 하늘에 닿아 구름이 되고
쿠바에서 가장 좋았던 곳을 꼽아보라면 역시 바다다. ‘카리브해의 진주’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섬나라답게 어느 지역을 가나 멋진 풍경을 품고 있긴 하지만,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까운 거리에서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수도 아바나의 말레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말레콘(Malecón)은 스페인어로 ‘둑’, ‘방파제’라는 뜻인데 대서양과 맞닿아 있는 아바나 북쪽 해안을 ‘말레콘’이라고 부른다.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말레콘을 찾았다. 연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청년,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왁자지껄 웃음이 그치지 않는 10대 아이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아저씨, 화려한 컬러로 단장한 올드카를 타고 드라이브에 나선 관광객들, 홀로 앉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까지 말레콘에선 아침이든 저녁이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파도를 바라보아도, 베다도에서 센트로 아바나 방향으로 끝없이 걸어도 매일매일 새로운 스토리가 태어나는 곳이었다.
아바나를 떠나기 전날,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특별한 계획 없이 베다도 지역을 거닐다 말레콘 방향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말레콘으로 날아오르는 집채만 한 파도를 목격했다. 해일은 아니다. 바람의 지휘 아래 무의식적으로 춤추고 있는 파도라고 해두자. 그렇게 어마어마한 파도가 도로로 넘실대고 있는데 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파도를 맞으며 해변 도로를 달린다. 푸조(Peugeot) 마크가 붙어 있는 신식 자동차도, 지붕이 오픈된 클래식 올드카도 차체보다 높은 파도 속으로 삼켜졌다가 나타났다. 얼마나 기묘한 장관인지 2시간 동안이나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30m 이상 떨어진 곳에 서 있었는데 머리부터 입고 있던 옷과 가방, 카메라까지 몽땅 다 젖었다.
예측할 수 없는 쿠바의 매력
쿠바에 처음 도착한 날 밤, 나는 시커먼 어둠 속에서 으르렁대는 말레콘 파도 소리에 숨을 죽였다. 다음 날 아침 눈앞에 펼쳐진 눈부시게 파랗고 깨끗한 바다는 지구별 그 어느 땅보다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이런 거로구나, 쿠바의 매력은.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 뜨거운 태양과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물기를 머금은 서늘한 바람까지. 예측 가능한 삶은 안정적이지만 권태롭다. 쿠바에 머무는 동안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 생수와 화장지 같은 생필품은 당일 판매 할당량이 차면 재고가 있어도 판매하지 않고, 물론 재고가 없어서 구매할 수 없을 때도 많으며, 레스토랑 메뉴판에 있는 메뉴도 재료가 동나서 주문할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장거리 이동을 위해 주로 이용하는 비아술(Viazul) 버스 티켓은 원하는 날짜와 시간의 표를 구하기 어려울 때도 많았다(주요 도시 간 국내선 항공편이 있긴 하지만 어떤 도시는 일주일에 한 대, 2-3일에 한대 정도 간헐적으로 운항되고 있어서 좌석을 확보하는게 쉽지 않고 노후된 비행기로 인해 안전에 대한 우려도 커서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비아술 버스를 이용한다). 무엇을 사든, 무엇을 하든 줄을 서야 하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 쿠바의 문화는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성격 급한 한국인이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매일같이 절망의 나락으로 끌어 내렸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섰을 때 말갛고 순수한 행복을 선물하는 곳, 오랫동안 동경했던 꿈의 나라, 그 사이 내게도 쿠바에 대한 애증이 생긴 듯했다. 다시 쿠바에 방문하는 날 나는 호세 마르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호텔 리비에라(Riviera) 옆 그리운 말레콘으로 달려갈 것이다.
천국은 이런 곳이 아닐까
자원이 풍부하거나,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거나, 특별히 아름다운 땅은 언제나 누군가 탐하고 점유하는 법이다. 그게 인류의 역사가 아니던가. 쿠바는 아름다운 땅이고,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 좋은 위치에 있는 섬나라다. 스페인도, 프랑스도, 영국도, 미국도 이 땅을 원했다. 400년 가까이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60여 년간 정신적으로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1950년대에는 미국의 부호들이 아바나를 유흥의 도시로 이용했다고 한다. 영화 <대부2>를 보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는데 뉴욕 마피아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인과 민간인도 쿠바를 휴양지로 이용했다.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140km 정도 떨어진 곳에 플로리다 해협과 접한 카리브해 최대 규모의 휴양지 바라데로(Varadero)가 있다. 아콰마린(Aquamarine) 컬러의 투명하고 깨끗한 바다, 20km에 걸쳐 펼쳐지는 고운 황금빛 모래사장, 바다같이 깊고 푸른 하늘. 산타마리아 해변과 카리브해의 앙콘 해변(Playa Ancon)도 가봤고, 플로리다 해협 건너의 키웨스트(Key West), 마이애미 해변도 가봤고, 지중해의 여러 해변도 가봤지만, 단언컨대 바라데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다. 쿠바와의 국교를 단절하면서 더 이상 바라데로에 갈 수 없게 된 미국인들은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 멕시코 칸쿤(Cancún) 해변을 바라데로처럼 개발했다고 한다.

바라데로 해변은 이미 대부분 관광 상품화되어 올인클루시브(allinclusive) 호텔들이 밀집해 있다. 다시 말해 바라데로 해변을 즐기기 위해서는 호텔에 숙박을 하거나 원데이 호텔 이용권을 구입해야 한다는 말이다. 당연히 쿠바 현지인들이 이용하기엔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해변에서 만나는 사람은 모두 캐나다와 유럽 관광객이다. 하지만 쿠바 현지의 생생한 느낌을 체험하고자 배낭 여행을 온 여행자라 하더라도 바라데로 해변은 꼭 한 번 들러봐야 하는 곳이다. 바다라고 다 같은 바다가 아닌 것이다. 분주한 서울의 일상과 아바나의 올드카,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 시끄럽고 번화한 모든 현실에서 뚝 떼어내어 속된 세상과 단절된 천국의 어느 해변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나는 바다를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바닷물에 몸 전체를 담근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바라데로에서는 이 맑은 바다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죄를 범하는 것이다. 망설임 없이 바닷물에 들어가 하루 종일 풍덩거렸다. 이곳에서 그대로 죽는다해도 아무 상관없으리. 여기는 천국이니까. 나는 이곳에서 열 살짜리 아이가된 것 같았고 영원히 해가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의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다. 오후 늦게부터 검은 구름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마침내 엄청난 소나기가 바라데로의 해변 위로 퍼붓기 시작했다. 때때로 내리치는 천둥소리와 번개가 바다 같은 하늘을, 하늘 같은 바다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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