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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허기를 채울 시간

리틀 포레스트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쓴 자전적 소설의 제목인데,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흥행했다. 이혼 후 지칠 대로 지친 주인공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며 행복을 찾는다는 내용으로,
보통의 우리에겐 다소 꿈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무엇보다 먹는 것이 첫째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가르쳐준다. 기도도, 사랑도 그다음인 것이다.
글. 김은경(시인, <영화의 심장소리> 저자)
마음의 허기를 달래는 소울 푸드
도시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혜원(김태리)은 불쑥 고향에 내려온다. 이유는 ‘배가 고파서’였다.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편의점 도시락으로 허기를 때우던 혜원은 도시락을 삼키지 못해 뱉어내고 만다. 인스턴트 음식은 그녀의 정신적 허기를 채우지 못했던 것이다. 비어 있는 고향집에서 그녀는 남아 있는 한 줌의 쌀로 밥을 한다. 그리고 꽁꽁 언 밭에서 배추를 뽑아 된장국을 끓인다. 밥과 된장국이 고향에서의 첫끼였다. 두 번째 음식은 칼칼한 수제비와 배추 부침개였고, 그것들은 그녀의 정신적 허기를 메우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잘 왔어,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며 두 팔로 안아주는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혼자 지내기 무서울까봐 강아지를 내려놓고 가는 남자(인) 친구가 있었다.
혜원은 음식을 만들어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다. 막걸리를 빚어(놀랍게도) 마시고, 시루떡을 쪄서 먹는다. 봄이 오자 꽃잎이 가득한 파스타를 만들고, 여름에는 친구와 함께 다슬기를 잡는다.
가을에는 밤조림을 만들어 먹는다. 그것들은 혜원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울 푸드’였다. 곧 서울로 올라가겠다던 혜원은 그곳에서 사계절을 난다.
지친 청춘의 자급자족 농촌 라이프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이가라시다이스케의 만화가 원작이다. 일본에서는 <여름과 가을>, <겨울과 봄> 두 편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일본판이 심심하리만치 음식과 자연에 집중했다면, 한국판은 좀 더 스토리가 있다. 미학적인 면에서 보자면 아마도 일본판에 더 점수를 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판의 미덕은 끈끈한 정과 사람이 있다는 것, 함께 먹는 것의 즐거움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엄마와의 관계도 좀 더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배우 문소리가 연기하는 혜원의 엄마는 참 멋지지만, 꽤 비현실적이다. 자식의 수능이 끝났다고 자신의 삶을 찾아 훌쩍 떠나는 엄마가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20대 아가씨가 온갖 음식을 척척 해내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결국은 이 영화도 다분히 판타지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문득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소설 제목이 생각난다. 고향에 비어 있는 집이 있고, “잘왔다, 보고 싶었다”며 두 팔 벌려 안아주는 친구가 있고, 그곳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척척 해낼 수 있는 이 모두가 이미 우리에겐 꿈같은 일이다. 류준열이 연기하는 혜원의 친구 제하도 현실적인 인물은 아니다. 수많은 영화의 주인공이 그렇듯 사표를 던지고, 고향에 내려와 아버지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청년. 이 영화를 보고, 치열한 대한민국의 청춘들은 과연 기대만큼의 위로를 받았을까?
음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사랑한다는 것
사실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에는 치열한 고민은 없다. 그곳 사람들이 그렇듯 영화도, 자연도 조용하기만 하다. 친구와 함께 음식 만드는 일도 조용조용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왁자지껄하게 관계를 맺고 음식을 만든다. 청춘들의 삶이 치열한 만큼 고민도 치열하고 진지하다. 함께 떠들며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즐거워한다. 고단한 삶이지만, 사람 냄새가 더 진하게 난다. 두 영화를 비교해보면 각각 그 나라의 특색이 담겨 있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에 등장하는 고유의 음식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무척 재미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다 보고 나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얼갈이배추를 사다가 물김치를 담갔다. 아삭거리는 식감이 그리워 오이소박이도 만들었다. 그리고는 요리법을 찾아 다슬기를 듬뿍 넣고 국을 끓였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고디탕이라 불리는 다슬기 해장국이다. 장 보러 나갔더니 시골에서 잡았다는 다슬기가 눈에 띄었다. 비록 냉동한 채였지만,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영화 속 다슬기 잡는 풍경이 너무 정다워 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여름날, 한밤중에 친구와 다슬기를 잡는 장면은 영화 속 가장 아름다운 장면의 하나다.
정성껏 요리를 하고 나자, 나는 어쩐지 정갈한 마음이 되었다. 요리를 하는 일이 귀찮거나 힘든 노동이 아니라 신성한 행위로까지 여겨졌다. 삶을 사랑하는 이만이 즐겨 요리를 할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세상에는 요리를 잘하거나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요리를 좋아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으로 나뉠 것인데, 사실 나는 후자 쪽이다. 앞으로는 바뀔지도 모르겠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니 어느 때보다 맛이 좋은 것은 물론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기쁜 마음으로 부엌일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완성도를 불문하고 그 어떤 명작 영화보다 소중하게 마음에 남는 영화가 됐다. 기쁘게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다림질까지 하게 만들었다. 영화를 보고, 요리를 했을 뿐인데, 이렇게 마음이 맑아지다니…. 요리를, 음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사랑한다는 것과 동의어인 모양이다.
<내가 사랑한 지중해>는 시인 장석주가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하고 나서 쓴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하지만, 누구와 어떻게 먹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먹고 마시는 일을 즐거워하라. 그러기 위해 우선 음식에 대한 즐거운 기대를 가질 것, 음식이 혀의 미각 돌기에 닿을 때의 느낌을 상상할 것, 먹는 즐거움을 더 오래 지속하려면 오래 씹을 것, 탐식을 삼가고, 적당할 때 멈출 것, 품위 있게 음식을 먹을 것, 음식에 대한 경의를 표할 것…’이라고 했다. 이 정도면 먹는다는 것은 단지 배고픔을 해결하는 행위가 아니다. 먹는 것이 곧 인생을 대하는 태도이고, 살아가는 방식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식에 지나치게 집착하지는 말 일이다. 옛 글(주역)에도 ‘위장을 6할만 채우면 무병장수 한다’고 했다. <소박한 밥상>을 펴냈던 헬렌 니어링은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고, 자연과 대화하고, 친구를 만나는 데 쓰자’라고 했다. 음식에 어느 만큼의 분량을 할애할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우리는 오늘도 한 끼의 음식을 먹는다. 간단히 먹든, 푸짐하게 먹든 중요한 것은 감사히 먹고, 즐겁게 먹는 것이리라. 오늘 내 앞에 놓인 것이 편의점 음식일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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