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꿈, 순수의 고향
이탈리아 시칠리아

Sicilia

책을 읽다가 활자들 사이로 떠오르는 어떤 장면 때문에 되살아나는 추억의 장소가 있다. 영화나 TV를 보다가도 간혹 그럴 때가 있다.
보통은 기억에 남는 여행지, 특별한 추억을 묻어둔 곳이 그렇다. 필자는 ‘시칠리아’가 무대로 등장하거나 관련된 단서가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명확히
규정하기 힘든 아련함으로 노스탤지어에 젖고 만다.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세상엔 경이롭고 아름다운 여행지가 많지만 시칠리아는 단 1그램의 허세와
과장을 보태지 않고도 ‘완벽하게 훌륭한 여행지’라고. 이는 결코 필자의 주관적인 감상만이 아님을 이미 많은 거장들의 예찬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글. 손경수(<열정의 땅, 시칠리아> 저자)
시칠리아를 보고 반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로 향할 뿐 시칠리아까지 걸음이 닿지 못한다. 심지어는 ‘거기가 어디?’인지를 되묻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근래에 들어서야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시칠리아의 ‘존재’를 알리게 되어 반갑다. 정해진 짧은 지면에 시칠리아를 제대로 소개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세계 문명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서구 문명의 뿌리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시칠리아는 인류 역사의 오랜 흔적과 찬란한 문화유산, 눈부시게 뜨겁고 아름다운 지중해의 풍광, 신선하고 풍요로운 먹거리의 천국이다. 게다가 모두가 사랑하는 영화 <시네마 천국>, <그랑블루>, <대부>, <일 포스티노>, <말레나>의 배경이 된 촬영지가 바로 이곳이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시칠리아를 소개하면 좋을까 고민한 끝에 민족 대명절 추석이 있는 9월인 만큼 ‘고향’과 ‘그리움’을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의 영화 속 시칠리아를 소개하고자 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랑블루>의 타오르미나
바다를 사랑한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그랑블루>는 유럽 최고 높이의 활화산 에트나(Monte Etna) 근처에 있는 휴양지 타오르미나(Taormina)를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시칠리아섬 동부 해안 이오니아해(Ionian Sea)가 내려다보이는 타우로산(Monte Tauro) 기슭, 해발 204m의 절벽 위에 형성된 작은 마을 타오르미나는 아름다운 해안 경관과 1년 내내 온화한 기후로 시칠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그리스 극장 테아트로 그레코(Teatro Greco)에 다다르면 기원전 395년에 지어진 그리스 유적 뒤로 코발트블루빛의 바다와 흰 구름, 멀리 남서쪽으로 해발 3,323m의 에트나산이 검은 연기를 뿜는 장관을 마주하게 된다. 괴테는 이곳을 ‘작은 천국의 땅’이라고 묘사했고, 소설가 모파상은 ‘모든 것들은 마치 인간의 눈과 정신 그리고 상상력을 유혹하려고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라는 찬사를 남겼다. 포르타 카타니아(Porta Catania)와 포르타 메시나(Porta Messina)를 연결한 중심거리 코르소 움베르토(Corso Umberto)에는 럭셔리 호텔과 부티크, 기념품 가게, 카페, 레스토랑 등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줄지어 있어 여행자들의 발길을 잡아 이끈다. 타오르미나의 사랑스러운 거리와 골목길, 마차로(Mazzaro) 해변에서 <그랑블루>의 주요 장면들이 촬영되었고, 매해 여름 국제영화제 타오르미나 필름 페스트와 오페라, 무용, 연극, 음악 콘서트 축제인 타오르미나 아르떼가 개최되어 전 세계의 아티스트들이 모여든다.
해발 450m의 타우로산에는 독립된 세 개의 작은 마을이 층층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아래는 그리스가 시칠리아섬에 처음으로 건설한 식민도시였던 지아르디니 낙소스(Giardini-Naxos)가, 낙소스에서 조금 떨어진 높은 곳에 타오르미나가, 타오르미나에서 굽어진 산길을 5km 정도 올라가면 아담한 힐탑 빌리지 카스텔몰라(Castelmola)가 있다. 수백 년 동안 반복되어온 해적과 외세의 침략을 피해서 보다 높은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온 시칠리아인들의 고단한 역사인 셈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높은 절벽 위에 건설된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 해안의 마을들은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 되었다.
<일 포스티노>와 <오딧세이아>의 무대, 에올리에제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의 유네스코 세계유산(53개)을 보유하고 있는 이탈리아는 총 다섯 개의 세계자연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중 두 개가 시칠리아에 있는데, 하나는 에트나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에올리에제도(Isole Eolie)다. 티레니아해의 깊은 바다 위에 별자리처럼 흩어져 있는 일곱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에올리에제도는 <오딧세이아>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이 글을 만난 독자들은 시칠리아를 방문할 때 활화산 산맥이 자리하고 있는 에올리에제도의 장관을 꼭 경험했으면 좋겠다. 모든 섬을 돌아볼 일정이 안 된다면 배편이 연결되는 섬을 선택해서 방문하는 것도 괜찮다.
밀라초에서 에올리에제도의 섬들을 연결하는 배편은 대부분 수중익선으로 흔들림이 적어 멀미에 약한 사람도 거뜬히 탈 수 있다. 소설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를 영화화한 <일 포스티노>는 극중에서 나폴리로 그려지지만 사실은 에올리에제도의 살리나(Salina)섬에서 촬영한 것이다. 네루다 시인이 머물던 집과 마리오의 해안가 집, 마리오가 편지를 배달하러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길 등 폴라라(Pollara) 마을을 방문하면 영화 속 멋진 풍경을 그대로 만날 수 있다.
활화산 섬인 스트롬볼리(Stromboli)와 불카노(Vulcano)를 품고 있는 에올리에제도의 비경은 예술적 감탄과 영감을 끌어내게 만드는 모양이다. 유럽 문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오딧세이아>에도 에올리에제도가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 트로이 전쟁에서 목마를 고안해 그리스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오딧세우스는 바다의 신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 자신의 고향 이타카(Ithaka)섬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0년 동안 바다를 방황하게 된다. 그 여정 가운데 오딧세우스는 세이렌 자매의 노랫소리에 매혹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배 기둥에 묶어두는 일화가 나오는데 세이렌이 출몰했던 바다가 에올리에제도라고 한다. 문명 발생의 초기부터 인간이 탐구해온 인생의 위엄과 쾌락, 죽음에 관한 고찰을 예술적 구성으로 엮어낸 <오딧세이아>는 서구 문학사 전반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구 문학이 태어난 에올리에제도. 에트나 화산과 북쪽 나폴리의 베수비오산을 연결하는 200km 길이의 거대한 화산 산맥에 속한 7개의 보석 같은 섬을 직접 만나보고 싶지 않은가.
<시네마 천국>을 만나다! 체팔루 & 팔라초 아드리아노
티레니아해를 마주하고 있는 작은 마을 체팔루(Cefalu)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부드럽고 고운 모래 해변과 바다를 향해 드문드문 놓여 있는 벤치와 작고 아담한 항구. 체팔루는 마음속에 평안과 행복감을 채워주는 마을이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빠져나와 체팔루로 향하는 좁은 길에 들어서면 팔레르모에서 메시나 해협으로 가는 철도를 지나게 되고, 300m 높이의 돌 산 로카(Rocca) 아래로 해안을 향해 펼쳐진 붉은 지붕들이 펼쳐진 풍경을 보게 된다. 체팔루 구시가지의 좁다란 골목길에는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파는 상점과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고, 로카 바로 아래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두오모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몬레알레와 팔레르모의 팔라티나 예배당에 비하면 규모가 작긴 하지만 시칠리아의 아랍-노르만 건축물 중 가장 오랜된 비잔틴 양식의 황금빛 모자이크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체팔루에서 자동차로 2시간쯤 이동하면 <시네마 천국>의 또 다른 촬영지 팔라초 아드리아노(Palazzo Adriano)에 다다른다. 이곳은 어린 토토와 알프레도, 마을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었던 극장 앞마을 광장(움베르토 1세 광장)과 종탑, 분수대의 풍경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인구 2,500명의 작은 마을 팔라초 아드리아노에서는 특별한 문화 유적지나 화려한 볼거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곳을 찾아오는 여행자는 오직 <시네마 천국>의 노스탤지어를 품고 오는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꺼이 한아름의 행복과 만족감을 이고 돌아간다.
누구에게나 그런 곳이 있을 것이다. 생물학적 고향은 아니지만 어쩐지 고향처럼 편안하고 정겹게 느껴지는 곳. 필자에게는 시칠리아가 그런 곳이다. 노아가 방주 문을 열었을 때 비둘기가 땅에 물이 빠진 징표로 올리브 이파리를 물어다 준 것도, 시칠리아에서 세계 최고 품질의 올리브가 생산되는 것도, 필자의 별명이 올리브인 것도, 맛있는 올리브를 좋아하는 것도 다 뭔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우겨본다.
“여기를 떠나라. 이 땅엔 희망이 없어. 여기에서 계속 살면 여기가 세상 전부라고 생각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지. 그런데 몇 년 떠나 있다가 돌아오면 모든 게 변해 있어. 시간의 고리가 끊어진 느낌이지. 익숙했던 건 다사라지고 다 낯설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 근데 넌 눈 먼 나보다도 앞을 못 보는구나. 산다는 건 영화와는 달라. 인생은 훨씬 더 힘들지. 여기를 떠나라! 로마로 가! 넌 젊어. 세상을 거머쥘 수도 있어. 난 늙었다. 여기서 너와 수다 떨기 싫어. 멀리서 네 명성만 듣고 싶다.”
영화 속 알프레도 아저씨가 자신의 마음을 담아 토토에게 해준 마지막 조언이다. 알프레도의 뜻을 이해한 토토는 로마로 가서 30년간 고향 시칠리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정진했고, 마음속에 품었던 꿈을 이루었다. 알프레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돌아온 시칠리아는 3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만 늙었을 뿐. 실제로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눈에 그러했을 것이다. 시칠리아를 만나는 것은 단순히 이탈리아 남부의 섬 하나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 서구문명의 뿌리를 이해하는 시작점을 찾아가는 일이다. 필자가 시칠리아에 매료된 것처럼 시칠리아 땅을 밟고 그 공기와 그 햇살을, 그 바다를 만나게 되는 이들은 분명 시칠리아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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