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에
그 자동차가 있었네

자동차와 영화는 그 시작 시기가 비슷하다. 칼 벤츠가 만들었던 최초의 자동차는 1886년 등장했고,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최초의 영화(40초 분량의 영상일 뿐이었지만)는
10년 뒤인 1895년 만들어졌다. 이후의 발전상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동차와 영화는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20세기의 찬란한 시작을 함께 한 것은 물론,
지금까지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거대 비즈니스다.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영화 속 자동차를 소개한다.
글. 이융(자동차 칼럼니스트) / 일러스트. 이혜헌
영화 속 시대를 드러내는 아이템
영화에서 시대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아이템은 배우들의 옷과 헤어스타일이다.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하자면 자동차가 있다. 사극이 아닌 다음에야, 자동차가 존재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자동차는 시대를 상징하는 것은 물론,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거나 중요한 사담이 오가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자동차의 시대성이라는 측면에서 2017년 개봉했던 <택시 운전사>는 손에 꼽힐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현대 포니와 기아 브리사는 1980년이라는 시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도구이자, 사건의 전개를 담당하는 핵심 아이템이다. 영화 속에서 줄지어 선 택시가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추격을 막는 장면, 별것 아닌 서민들이 모여 권력과 맞서는 이 장면이야말로 영화의 핵심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기아 브리사를 몰던 1980년의 송강호는 2003년 YF쏘나타를 타고 계속 택시를 운전한다. 시대의 목격자로 남아 있는 송강호의 가장 친밀한 파트너는 자동차다.

21세기 가장 훌륭한 멜로 영화 중 하나인 <건축학개론>에서 갈등이 폭발하는 순간은 이제훈이 어떤 장면을 목격하면서 시작된다. 부유한 선배로 등장하는 유연석이 자신의 쏘나타로 수지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그 장면. 이제훈은 혼자 실망하고, 혼자 포기하고, 혼자 분노한다. 돈 많고 잘생긴, 심지어 차까지 있는 부자 선배 유연석이 스스로를 위축시키고못나 보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애틋한 첫사랑은 시시하게 끝난다. 영화 속 배경인 90년대 후반, 마이카 열풍과 함께 대학가에서도 차를 운전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그런 시대적 배경이 영화에서도 드러난다. 물론 대학생이 마티즈나 엑센트도 아니고 쏘나타 같은 중형 세단을 타고 다닌 건 흔치 않은 경우였지만.
<범죄와의 전쟁> 초반의 배경은 80년대. 극 중에서 공무원과 조폭 두목으로 ‘끝발 좀 날리던’ 최민식과 하정우는 3세대 토요타 크라운을 탄다. 그 시절 ‘사장님’ 소리 듣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크라운을 탔다(영화 <1987>에서 고위 공무원인 치안감 역할을 맡았던 김윤석도 크라운을 타고 다닌다). 당시 고급차 시장을 점령하고 있던 건 일본차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6년 1세대 ‘각 그랜저’가 출시되면서 시장의 흐름은 완전히 바뀐다. 그랜저의 상품성이 그만큼 좋았기 때문이다. 크라운은 대부분 그랜저로 대체됐고, 영화에서도 80년대 후반이 되면 주인공들이 그랜저를 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세심하게 고증한 영화였던 셈이다.
자동차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액션
액션 영화에서 자동차 추격 신(카 체이싱)은 결코 빠질 수 없는 장면이다. 특히 정적인 장면 이후 카 체이싱 장면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과감한 앵글과 속도감이 분위기 전환에 훌륭한 처방이기 때문이다. 최근 가장 인상적인 카 체이싱을 보여준 영화는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이다. BMW의 스폰서십으로 제작된 영화기에 다양한 BMW 모델이 등장하는데, 백미는 톰 크루즈가 1983년형 5시리즈를 타고 달리는 파리 도심의 추격 신이다. 클래식 BMW가 비좁은 파리의 도로를 활보하는 장면은 감탄을 자아낸다.
마블이 제작한 <앤트맨과 와스프>에 등장하는 벨로스터는 어떤가. 물건을 거대화, 축소화시킬 수 있는 앤트맨의 능력 덕분에 신선한 액션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카 체이싱 장면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개미만 한 크기의 벨로스터가 실제 차량 크기로 커지면서 앞으로 뛰쳐나가는 장면은 근래 가장 신선한 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고털이들의 얘기를 다룬 <이탈리안 잡>에는 미니 쿠퍼가 등장한다. 이탈리아 특유의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뿐 아니라 지하철, 철로, 하수관까지 못 가는 곳이 없다. 미니 쿠퍼 특유의 작은 크기를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승화시킨 경우다. <앤트맨> 1편을 연출했던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베이비 드라이버>는 은행 강도단에 합류하게 된 천재 드라이버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레드 컬러의 스바루 WRX를 운전하면서 도시의 곳곳을 질주하는데 초반 10여 분의 카 체이싱 장면은 그 연출력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질주의 끝, 경찰 헬기를 따돌리는 장면은 오래 기억될 명장면이다.
마음을 훔치는 자동차
감정적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자동차도 있다. <라라랜드>에서 라이언 고슬링이 타던 뷰익 리비에라와 엠마 스톤이 타던 토요타 프리우스가 그렇다. 뷰익의 리비에라는 80년대 초반 출시된 낡은 컨버터블이다. 프리우스는 실용적인 차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사람의 성격을 약간은 유추해볼 수 있다. 없는 형편에도 굳이 오픈카를 몰고 다니는 낭만적인 기질의 라이언 고슬링과 현실에 어느 정도 발을 딛고 서 있으려는 엠마 스톤. 이들의 아름다운 이별은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첫 장면부터 예견된 건지도 모르겠다.
데이비트 크로넨버그의 1994년작 <크래쉬>는 <라라랜드>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정반대 지점에 있다. 이 영화는 교통사고로 자동차가 부서지고 몸이 파괴되는 순간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엘리어스 코티스는 제임스 딘의 교통사고를 똑같이 복제하고 싶은 욕망에 제임스 딘이 타던 포르쉐 550 스파이더를 타고 일부러 큰 사고를 낸다. 사고난 차량에서 피를 흘리며 내리는 그의 표정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크래쉬>는 자동차를 주제로 한 가장 퇴폐적이고 위험한 영화일 것이다. 영화를 만든 크로넨버그 감독은 실제로 아마추어 레이서기도 하다.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만큼 밀도가 높았던 드라마 <비밀의 숲>은 어떨까. <비밀의 숲>은 지난해 한국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였다. 조승우가 연기한 황시목 검사라는 역할은 뻔한 정의의 용사가 아닌 양심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그가 극에서 타던 차가 그랜저 IG였다. 조승우가 타는 그랜저 IG는 아스라한 그린 컬러인데, 드라마 전체의 음울한 분위기와 어울려 자꾸 마음을 건드린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이 드라마는 PPL의 좋은 선례라 할 수도 있다. 수습으로 데리고 있던 검사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은 조승우가 잠시 차선을 이탈할 때, 경고음이 울리면서 차가 MOBIS스스로 방향을 잡아주는 장면은 ‘현대 스마트 센스’라는 첨단 안전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었다. PPL이었지만, 억지스럽지 않고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미래에는 이런 차가 나올까?
리들리 스콧의 전설적인 SF를 이어간 <블레이드 러너 2049>에는 스피너라는 미래의 탈것이 등장한다.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비행자동차다. 원작 영화가 등장했던 1982년만 해도 아주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이제는 눈앞의 현실이 됐다. 플라잉카 제조사인 테라푸지아는 최근 ‘트랜지션’이라는 이름의 플라잉카를 내년부터 판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말 그대로 하늘도 날고, 땅에서 달릴 수도 있는 항공기다. 그리고 2023년에는 스피너처럼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TF-X라는 플라잉카도 출시할 계획이다. 영화 속에 등장했던 스피너가 현실로 나타나기까지 몇 년 남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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