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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세월의 풍상 뒤에 깃든
숱한 이야기들

진천 농다리

사력암질의 붉은 돌을 쌓아 만든 농다리(충북유형문화재 제28호)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동양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가장 오래되고 긴 돌다리이다. 설경이 아름다워 상산팔경 가운데 6경 농암모설(籠岩暮雪)이라 부르는 진천 농다리를 다녀왔다.

글과 사진. 임운석(여행작가)

01. 고려 초 임 장군이 용마를 타고 만들었다는 농다리

02. 세금천을 건너는 지네 형상처럼 보이는 농다리.
모두 28칸으로 교각과 상판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모아 만들었다.
03. 자연석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리는 ‘들여쌓기’와
‘엇물려쌓기’를 해서 교각을 만들었다.

농암모설(籠岩暮雪)의 진경을 찾아

며칠 동안 하늘을 자주 올려다봤다. 충북 진천 여행을 앞두고 눈이 오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진천 일대의 좋은 경치 여덟 가지를 꼽은 ‘상산팔경’ 가운데 6경인 ‘농암모설(籠岩暮雪)’. 겨울철 농다리 주변 산과 강에 흰 눈이 소복이 쌓인 경관을 말하는 것으로 정취가 빼어나다고 한다. 하지만 기다림이 깊어질수록 하늘은 무심히도 메말라갔다.
진천을 향하던 날. 무심하던 날씨는 짓궂게도 최고의 한파로 맞아주었다. 농다리가 있는 진천 구곡리에는 메마른 잔가지 사이로 바람만 윙윙거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휑한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농다리전시관. 그곳 굴뚝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훈기가 느껴졌다. 전시관을 지키는 안내원은 농다리에 얽힌 이야기를 타래를 풀어내듯 술술 풀어놓았다.
다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 인류 문명의 터전이 다리를 놓아야 했던 강을 중심으로 발달했기 때문이다. 큰 강은 인간에게 신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문명 발생지인 나일강, 황허강 같은 4대강이 그렇다. 인간에게 큰 강은 경배의 대상이었지 정복할 대상이 아니었다. 대신 비교적 작은 개천은 극복과 도전의 몫으로 여겨졌다. 통나무나 큰 돌을 띄엄띄엄 놓아 지역과 지역을 오가는 왕래의 수단으로 다리를 이용한 것이다. 이것이 다리의 시초다.

농다리에 전해지는 다양한 전설

세금천이 흐르는 농다리 앞에 섰다. 첫 느낌은 돌무더기 같다. 자리를 조금 비켜서 보니 교각과 상판석이 보이는 다리의 모습인데 거대한 지네가 물을 건너는 형상이다. 농다리는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할 뿐 누가 지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1930년대 발간된 「조선환여승람」과 「상산지」에 따르면 ‘고려 초 굴치(굴티)의 임 장군이라고 전해오는 사람이 농교를 창설했다’고 기록돼 있다.

요즘처럼 몹시 추운 겨울 어느 날이었다. 추위를 무릅쓰고 세금천변을 서성이는 젊은 부인이 있었다. 때마침 천에 세수를 하러 나온 임 장군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는 까닭을 물었다. 여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친정으로 가는 길’이라 했다. 여인의 효심을 귀히 여긴 임 장군은 용마를 타고 돌을 날아 하루아침에 다리를 놓아준다. 그 덕분에 여인은 무사히 천을 건널 수 있었다. 또 다른 전설은 옛날 굴티 임씨 집안에 아들, 딸 남매가 있었는데 둘 다 힘센 장사였다고 한다. 이 둘이 어느 날 목숨을 걸고 내기를 했다. 아들(임 장군)은 굽 높은 나무 신을 신고 코뚜레를 꿰지 않은 송아지를 끌고 서울에 다녀오는 것이고, 딸은 농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이 광경을 지켜보니 딸이 먼저 다리를 완성할 것 같았다. 이에 아들을 살릴 묘책으로 딸에게 뜨거운 팥죽을 먹여 일을 늦추었다.
그러는 동안 아들이 돌아오자 화가 난 딸은 돌을 내리치고 약속한 대로 죽었다. 딸이 끝내지 못한 마지막 한 칸을 마을 사람들이 놓았는데 큰 장마가 오면 마지막 놓은 다리만 떠내려간다고 한다. 농다리가 울음소리를 내거나 상판석이 물에 뜰 경우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한국전쟁과 동학농민혁명 때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04. 농다리전시관 내부, 사계절 농다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농다리에 감춰진 과학적 원리

농다리가 1,000년 동안 끄떡없이 보존될 수 있었던 까닭은 과학적인 축조법에 있다. 구곡리를 흐르는 세금천은 가리천과 태산천이 합류한 줄기라서 수량이 많고 수심이 깊은 편이다. 장마철에 홍수라도 나면 거센 물줄기가 다리 위를 세차게 흘러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라 한다. 강한 물살에도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먼저 다리가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도록 튼튼한 ‘기초석’ 쌓기가 중요하다. 다음 단계로 기초석 위에 자연석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리는 ‘들여쌓기’와 ‘엇물려쌓기’를 해서 교각을 만들었다. 교각의 크기는 대체로 30~40cm이다. 놀라운 것은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별자리 28수를 응용하여 교각의 숫자를 28개에 맞춘 점이다. 교각부터 상판석까지 다리 전체에는 붉은색을 띤 돌을 사용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처럼 불그스름한 빛이 나는 돌을 사용한 것은 이 지역에 사력암질의 돌이 많기도 하겠거니와 ‘자석배음양’, 즉 음양의 기운을 고루 갖춘 돌이라는 고서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다리가 검붉은 지네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교각은 직사각형이나 원형이 아닌 유선형으로 만들어졌다. 물의 마찰을 줄이고자 한 의도로 물 흐름을 거스르지 않아 마찰력을 최소화한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상판석을 얹는 것. 농다리에는 상판석의 크기에 따라 1개 또는 2개를 얹었다. 큰 것은 길이 170cm, 너비 80cm, 두께 20cm이다. 다리를 직접 걸어보니 돌이 덜컹거리고 흔들린다. 돌과 돌 사이를 석회 등으로 채워야 하는데 작은 돌로 메워서 그렇다. 비과학적인 것 같지만 물의 흐름을 막지 않으려는 비밀이 숨어 있다.

05. 농다리 유래비에 전설이 담겼다. 06. 농다리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는 <조선환여승람> 07. 농다리와 초평저수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농암정

농다리 건너 초평호 미르숲길

농다리를 건너 봉긋한 고갯마루에 선다. 이 일대 지형이 용의 형상이고 필자가 선 이곳은 용의 허리 부분으로 용고개라 한다. 옛날 고개 너머 화산리에 시주 갔던 승려가 있었는데 부잣집에서 시주는커녕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승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앞산을 깎아 길을 내면 더 큰 부자가 될 텐데….’ 이 말을 들은 부자가 산을 깎아 길을 냈는데 알고 보니 용의 허리를 잘라 용을 죽였던 것.
이후 부자는 망했고 용고개는 살고개라 불리게 되었다. 고개 너머에는 미르숲이라 하여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길을 따라 정자와 쉼터 등 쉴 만한 곳이 여럿이다. 호젓한 길을 따라 초평저수지가 그윽하게 담겼다. 저수지 앞에는 현대모비스 야외음악당이 부채처럼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수변 산책로가 잇대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끈다. 끝자락에는 하늘다리가 삭풍을 이기고 매달려 있다. 이동할 때마다 조금씩 흔들거려 온몸이 서늘하다. 현대모비스 야외음악당에서부터 하늘다리까지 연결된 수변 데크길을 초롱길이라 부른다.

발길을 돌려 다시 농다리 앞에 선다. 농다리는 인위적이지 않다. 자연의 것으로 자연답게 만든 결과물이다. 다리는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소통과 문화 확장의 통로가 되었다. 또한 예술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삶의 애환과 추억이 서린 그리운 풍경이기도 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천 년 전에 지어진 농다리를 찾아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08.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초평저수지가 그윽하게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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