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DAI MOBIS

살려 하니 죽고,
죽으려니 살았다

<명량>과 <남한산성>

글. 심영섭(심리학자, 아트테라피 대표)

명량

<명량> 속 선조와 이순신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는 어떤 면에서 무능한 왕이었다. 영화 <명량> 속 선조는 현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칠천량에서 원균의 수군이 궤멸하자 이순신의 해군에게 육군에 합류하여 싸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순신의 부하들도 ‘이 싸움은 불가능하다’며 어명을 따르라고 진언한다. 부하 배설은 이 싸움은 백전백패 즉 필패(必敗)할 것이라고 판단하며 목숨 부지를 위해 이순신을 배반한다.
무엇보다도 해군 사령관인 이순신에겐 배가 거의 없었다. 비행기가 없는 공군을 상상해보라. 탱크가 없는 기갑부대를 상상해보라. 그것이 말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이순신의 실제 인간적인 면모는 어땠을까.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 역을 맡은 배우 최민식은 영웅이 아닌, 인간적인 고뇌와 고독이 뼛속까지 스며든 범부(凡夫)로서의 이순신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그가 연기한 이순신은 갑옷을 입은 장수라기보다는 깊은 밤에도 잠을 못 이루는 봉두난발한 피폐한 노인의 이미지이다. 그곳엔 어머니의 제사도 제대로 받들지 못하는 아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만 그 어떤 감정도 내색도 할 수 없는 쓸쓸한 사내가 살고 있다.
낮에는 군법에 따라 도망가려는 부하의 목을 베는 지엄한 리더이지만, 밤에는 유령이 된 전우들에게 “술 한 잔도 안 받고 가냐”며 손을 내미는 무기력한 남자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목숨까지 거두려 했던 임금, 감정적이고 일관성 없는 선조를 끝까지 쫓을 수 있는 충심이 있었다. 그것은 임금보다 백성이 위에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육군에 합류하라고 명을 내린 선조에게 그 유명한 장계, ‘상유십이척(尙有十二隻: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이라는 상소를 올린다. 즉 군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은 해군이며, 배가 있는 한 싸울 것이고, 당신을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선조에 대한 설득인 것이다.

<남한산성> 속 인조와 최명길

한편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마음의 심지가 굳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왕으로 묘사된다. 신하들이 식량이 없어 백성들이 굶고 있다는 현황을 전하자, 그는 이렇게 명령한다.
“아껴서 오래 먹이되, 너무 아끼지는 마라.” 전형적인 이중구속형 커뮤니케이션이 아닐 수 없다. 아껴 먹이라는 소리인가, 아끼지 말라는 소리인가. 1차원상의 메시지가 충돌하면서 신하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자 영의정이 “얼마나 아껴야 하겠습니까?”라고 구체적인 명령 하달을 원하자, 인조는 “그것까지 내가 정해주랴?”라고 답을 회피한다.

최명길의 인조에 대한 설득 역시 이순신과 비슷한 구석이 많다. 특히 백성을 향한 마음이 먼저 깃들어 있다는 점이 그렇다. 15만의 병력으로 쳐들어온 청나라의 황제에게 답서를 보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대목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왕에게 말한다.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제 나라 백성이 살아 돌아갈 길을 열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신하와 백성을 거느릴 자격이 있습니다. 지금 신의 목을 먼저 베시고 부디 전하께서 이 치욕을 견뎌 주소서.” 삶이 우선이니 지금의 불편한 감정을 견디어 달라는 전언이다.

살아야 죽음에 다다를 수 있는 길

이순신과 최명길에게는 있지만, 원균이나 김상헌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투명하게 현실을 인식하는 ‘현실 지각력’이다. 심리학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정신 건강의 원리이기도 한 이 개념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 혹은 객관적으로 지각하는 힘을 말한다.

예를 들면 ‘내 얼굴은 차게 보인다’라는 지각보다는 ‘얼굴이 무표정하다’는 진술이 더 현실적인 자기 지각이고, 애인에게 ‘버림받았다’보다는 ‘헤어졌다’고 말하는 편이 더 주관적 안경을 벗고 현실을 수용하는 말이다. 힘들면 힘든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대로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현실 지각력은 마음 건강에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최명길과 달리 척화파인 김상헌은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북방의 우리 군사력이 아직 온전하니 적의 보급로를 끊거나 경상, 전라, 충청의 장수들에게 격서를 보내 힘을 합쳐 청나라 군사들과 교전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진 ‘생존에 대한 갈망과 이기심’이라는 가장 중요한 명제를 놓친 것이다. 격서를 전달받은 도원수의 부하들은 오히려 ‘격서를 믿을 수 없다’거나 ‘보름날 검단산에 봉화를 올렸다가 적들에게 발각을 당하면 우리만 사지에 몰릴 것’이라고 걱정한다. 즉 독박을 쓰고 몰살을 당할까봐 오히려 몸을 사린다.

도원수는 “격서를 받고서도 따르지 않으면 어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뒷감당을 걱정하자, “그렇다면 격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하자”며 군사가 꾀를 낸다. 즉 전형적인 방어 기제인 ‘취소’ 행동을 통해 왕의 명령조차 없던 일로 치부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도모하는 것이 순리인 인간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적인 마음을 던지는 김상헌은 끝내 현실의 패배를 수용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다(영화에서는 자결로 끝을 맺지만, 실제 역사에서 김상헌은 자결에 실패 한 후 나이 들어 죽었다). 최명길의 경우는 아무도 쓰지 않으려는 답서를 써 나가는 중책을 기꺼이 떠맡는다. 그는 ‘글이 곧 길’이라고 인조에게 아뢴다. 삶의 길이란 살아야만 걸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라고 김상헌에게 설파하며, ‘살고자 한다면 말길을 트시라’고 왕에게 간언한다.

죽음에 담대해야 살 수 있는 길

이순신은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담대함으로 이 모든 상황을 헤쳐나간다. 출전하기 전날, 결의에 차서 부하들에게 “아직도 살 생각을 하고 있는가? 목숨에 기대지 마라. 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필히 살 것이다”라고 외친다. 그의 고함은 그냥 빈말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한 군인이 몸으로 습득하고 체화한 전투관 내지 생사관이다.

‘그냥 목숨을 던지자. 장수된 자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싸우다 죽으면 그것으로 됐다’는 결기. 그 결기로 흔들림 없이 전투를 수행한다면, 부하들과 백성을 휘어잡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는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순신의 부하들도 이런 비전에 완전히 동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이순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3도 수군 통제사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부하들을 끌고 해전에 나가지만, 이순신의 대장배만 적군과 대치하면서 고군분투함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배들은 저 뒤에서 싸움을 관망하는 형국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몸소 최악의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준다.

그는 울돌목 앞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어떻게 적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지 고심의 고심을 거듭한다(김한민 감독은 이 해전의 핵심이 ‘명량, 우는 바다’에 있다고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감독의 상상력으로 재해석된 해전에서 이순신은 우는 바다, 명량의 소리와 지형에 영감을 받고 그 영감에 조응하는 전략을 세운다. 명량은 전투에서 죽은 사내들의 곡소리를 낸다.

그것은 이순신 내면에 깃든 심연의 소리다. 이순신은 그 소리를 뒤따라 회오리치는 울돌목의 사지로 직접 뛰어든다.
자신 역시 그 사이렌의 한숨 같은 회오리 소리에 휘말려 죽어가겠지만, 적어도 부하들에게 용기를 심어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영화 <명량>이 죽어야 사는 길에 관한 영화라면, <남한산성>은 살아야 죽음에 다다를 수 있는 길에 관한 영화이다.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곳을 향해 갈 때만, 어떤 논공행상의 압력을 뛰어넘어 자기 구원과 타인에 대한 설득이 가능하다는 것을 두 영화는 거울처럼 서로 비추어준다.

항복을 뜻하는 삼전도비는 지금도 송파구에 남아 있으나, 그것을 아는 이는 적다. 419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순신은 광화문 한복판에 여전히 ‘큰 칼 옆에 차고’ 우리에게 살아남아 세상살이의 두려움을 뛰어넘으라고 명한다. 초라한 비석으로 남든 커다란 동상으로 버티어 섰든 살려고 하니 죽고, 죽으려고 하니 살아남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기는 전쟁 영화뿐 아니라, 처절하게 패배하고 졌던 역사의 한 단면을 굳이 들추어 봐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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