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들어가는 고택
안동 임청각

금빛 모래 바닥이 보일 듯 말 듯, 찰랑찰랑 강물은 햇살을 받아 빛나고 물결은 한가롭다. 낙동강 줄기가 휘돌아 태극 모양이 되는
안동 하회마을이다. 까맣게 얼굴을 그을린 뱃사공이 기다란 삿대로 강물을 젓는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보자. 말발굽처럼
휘어진 물굽이를 여럿 지나면 기왓골 예쁜 고택이 나타난다.
글과 사진. 이동미(여행작가)
강릉의 선교장이 배를 타고 들어갔다고 했던가? 여기 안동 낙동강가에도 꿈인 듯 생시인 듯 배를 타고 들어가는 고택이 있다. 대문이 누대로 지어져 주인 양반이 이따금 2층에 앉아 낚시를 즐기다 손님을 맞는다는 임청각(臨淸閣, 보물 제182호)이다. 가히 선비의 풍류가 넘치는 임청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이름을 땄다. 오늘은 이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보자. 고택스테이((故宅stay) 아니, 안동의 종택스테이(宗宅stay)다. 기왓골이 예쁜 임청각에 발을 들이니 암키와, 수키와의 곡선이 예사롭지 않다. 낙동강을 바라보며 앞은 낮고 뒤는 높게 지어 햇살이 골고루 든다. 여자들이 기거하던 안채와 남자들이 살던 사랑채 모두 나무를 이리저리 깎아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짜 맞추었다. 단아한 99칸의 집은 도대체 언제 지어졌을까? 임청각을 지은 이는 조선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라 한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편을 저술한 고려 말의 행촌 이암(李癌)의 손자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이고, 이원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 현감 이증(李增)이 이곳에 반했으니, 그의 3남인 이명이 중종 10년(1515)에 임청각을 지었다. 2019년에서 거슬러 올라가니 504년 전에 지어졌다.
재상 세 명이 나온다는 임청각의 우물방
임청각에서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안채로 들어가 중문 앞의 자그마한 방으로 간다.
임청각 안내 책자에 이 방은 산청(産廳)으로 소개돼 있다. 좋은 기가 맺혀 진응수로 솟아 나온다는 우물이 앞에 있어 우물방이라고 한다. 또 재상이 세 명 나올 방이라고도 한다.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을 포함해 두 명의 재상을 내었으니 아직 한 명의 재상을 기다리는 방이다. 저녁상을 물리고 풀벌레 소리 고즈넉한 툇마루에 앉아 주인장이 들려주는 석주 선생과 임청각의 사연을 들어본다. 먼지 그득한 시골집 곳간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야기책이 펼쳐지는 듯하다. 때는 1858년, 고성 이씨의 종손으로 석주 선생이 이곳 우물방에서 태어났다. 안동 유림의 명문가 자제이니 부러울 것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청년기에 들어서며 일제 침략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 농민전쟁, 청일전쟁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까지, 격변의 시대에 휘말린다. 조국을 지키지 못하고 전통과 예절을 받들지 못함에 죄책감과 분노를 느낀 장년 이상룡은 백성이 깨어야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계몽운동을 하고 의병 활동을 하지만 현실은 힘겹기만 했다. 1910년, 상황은 악화하여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고 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석주 이상룡은 지도를 펴놓고 고심하다 고구려의 옛 영토인 만주 땅에서 재기를 결심한다.
  • 임청각의 우물방에서 보이는 우물과 안채 마당
명문가 종손에서 독립운동가로
선산을 찾아 절을 올리고, 가산은 모두 처분해 만주 독립운동자금으로 준비하고, 노비 문서는 불살라 종들을 해방시킨다. 삭풍이 몰아치던 1911년 1월 5일, 석주는 52세의 나이에 5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망명길에 오른다. 안동~추풍령~서울~신의주~단둥~환인현 횡도천~유하현 삼원포에 이르는 2,500리의 망명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를 조국을 뒤로한 채 살을 에는 북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압록강을 건넌다. 국경을 넘으며 지은 석주의 거국시(去國詩)다. 석주는 우당 이회영과 함께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키워낸다. 독립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석 재산을 다 팔았고, 그것으로 모자라 임청각까지 팔기를 세 번이나 했으니, 고성 이씨 문중에서 매번 임청각을 다시 사들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맡고 군사기구인 서로군정서를 조직하며 무장 항일투쟁의 선봉에서 조국의 독립에 대한 희망, 그것 하나로 만주 생활을 버텨냈다.
  • 위패가 없는 임청각의 사당
    임청각의 소박한 아침상
  • 군자정에서 보이는 철길과 낙동강
오랜 세월을 간직한 임청각 돌담
조상의 위패가 없는 임청각의 사당
눈부신 아침 햇살과 재잘대는 새소리에 눈을 뜨니 임청각의 사랑채며 정자인 군자정(君子亭)이 눈에 들어온다. 화려한 누마루에 단아한 맞배지붕의 군자정 안에는 퇴계 선생의 친필인 ‘臨淸閣’ 현판이 걸려 있다. 군자정 옆쪽 언덕에 자리한 것은 사당(祠堂)이다. 그런데 뼈대 깊은 이 집 사당에 위패가 하나도 없다! 무슨 일일까? 석주 선생은 임청각을 떠나면서 위패를 모두 장주(葬主, 땅에 묻어 장사지냄)시켰다. 유림의 종손으로서 이처럼 비장할 수는 없다. 임청각은 원래 99칸 저택이었다. 임청각 앞으로 낙동강과 반변천이 만나 합수머리를 이루고 백두대간 줄기인 영암산이 뒤를 받치니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최고 명승지라 칭송했다. 하늘에서 보면 임청각의 건물은 일(日)자, 월(月)자 또는 합쳐진 용(用)자 형으로 지었으니, 임청각에서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해 아홉 분의 독립투사가 나왔고 외가를 포함해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40여 명에 이른다. 진정 독립운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곳을 일제가 그냥 둘 리 없을 터, 임청각의 맥을 끊기 위해 일제는 일부러 임청각을 지나도록 중앙선 철로(1936년 착공, 1942년 개통)를 개통해 대문간과 행랑채를 비롯해 임청각의 절반인 50여 칸을 파괴했다. 결국 일(日)자, 월(月)자 구조가 틀어졌고, 배를 타고 도착하던 입구에는 흉물스러운 철로가 놓였다. 강을 건너면서 바라보던 웅장한 자태도 철로에 가로막혀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석주 선생은 어떻게 되셨을까? 1932년 5월 12일 길림성에서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마라’는 유언을 남긴 채 7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이후 18년 뒤에 조국은 독립했다. 일제가 패망하고도 45년이 지난 1990년 10월, 그러니까 석주 선생이 임청각을 떠난 지 79년 만에 그의 유해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고, 국립대전 현충원에 모셔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었지만,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선생의 임청각은 아직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철길을 철거하고, 없어진 가옥이 복원되고, 낙동강 옛 나루터도 재현한다는 소식이 들리니 반갑기만 하다. 다음번에는 진짜로 나룻배를 타고 임청각에 들어가고 싶다. 중앙선을 지나는 열차의 요란함이 또다시 임청각을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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