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 바람의 다양한 모습

“바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아이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변신을 많이 해요.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주머니처럼 생겼을걸요?”,
“날쌘돌이처럼 생겼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바람의 얼굴을 다양하게 보았나 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만질 수도
없다면 그 궁금증은 더 커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거나 만질 수 없는 것들을 보는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 ‘비범하다’거나 ‘비상하다’라는
단어를 쓴다. 오래전부터 세상에는 바람을 닮은 꽃이 있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연으로 만들어진 이 꽃들은
바람이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꽃으로 보여준 또 다른 모습이다.
글. 이소영(소통하는 그림연구소-빅피쉬 대표, <그림은 위로다> 저자)
John William Waterhouse Windowers / 1902
봄바람을 닮은 꽃, 아네모네(Anemone)
살랑살랑 따스한 봄바람이 불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이 꽃이 핀다. 영어로는 ‘Wind Flowers’, 학명은 ‘Anemone’다. 이 꽃은 그리스어로 ‘바람’을 뜻하는 ‘Anemone’에서 유래했다. 외모도 여린 이 꽃에는 슬픈 전설이 존재한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꽃의 여신 플로라의 시녀 중에 아네모네라는 요정이 있었다고 한다. 이 아네모네가 어느 날 사랑에 빠지는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플로라의 남편이자 서풍의 신 ‘제피로스’였다.
제피로스 역시 아름다운 아네모네에게 마음이 끌렸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플로라는 아네모네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냈다. 하지만 사랑은 더 강해졌고 둘은 플로라 몰래 사랑을 이어간다. 플로라는 제비로 변해 날아가 둘의 밀회 현장을 확인하고 화가 나 아네모네를 꽃으로 만들어버린다. 제피로스는 아네모네가 꽃이 돼버리자, 매년 봄이 되면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으로 찾아가 꽃을 피워 만났다. 그래서 아네모네의 꽃말 중 하나가 ‘사랑의 괴로움’일까? 봄바람이 불면 ‘나는 오늘은 제피로스가 아네모네를 만나러 왔나’ 하고 생각한다. 어디로 갈지 몰라 휘청거리는 그림 속 여인은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1902년 그린 ‘Windowers’다. 문학과 신화 속 주인공을 작품의 주제로 즐겨 그리던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분 바람으로 피어난 아네모네를 보여준다. 너무 가녀려 쉽게 쓰러질 듯한 아네모네의 모습은 금방 사라지는 봄바람을 닮았다. 신화를 가장 신화답게 그린다는 평을 받는 워터하우스는 19세기 영국의 ‘라파엘 전파’다. 라파엘로 이전의 작품 세계를 추구하는 화가 중 여성을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그렸다. 어린 시절을 이탈리아에서 보내서인지 작품의 배경이 대부분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다.
Giovanni Battista Tiepolo / The Death of Hyacinthus 1752-53 / 232×287cm
질투의 바람이 만든 꽃, 히아신스(Hyacinth)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사랑한 또 한 명의 주인공은 히아킨토스(Hyakinthus)라는 소년이다. 히아킨토스는 스파르타 근처 아미클라이라는 도시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청년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히아킨토스는 원반 던지기 명수였는데, 태양의 신 아폴론은 히아킨토스를 동생처럼 아껴 늘 데리고 다니며 원반 던지기를 했다. 하지만 히아킨토스를 좋아했던 제피로스는 히아킨토스가 아폴론과 원반 던지기를 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아폴론과 히아킨토스가 원반 던지기를 하면 늘 바람을 불어 방해했다. 제피로스는 히아킨토스에게 자신과도 원반 던지기를 하자고 몇 번이나 부탁하지만 아폴론에게 충직했던 히아킨토스는 그 부탁을 거절한다.
결국 질투에 눈이 먼 제피로스는 아폴론과 히아킨토스가 원반 던지기를 할 때 원반을 향해 바람을 아주 세게 불었고, 날아가던 원반이 방향을 틀어 히아킨토스의 이마에 맞았다. 히아킨토스는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아폴론은 쓰러진 히아킨토스에게 한 모금만 먹으면 살아나는 신의 술 ‘넥타’를 뿌렸지만 사람인 히아킨토스에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히아킨토스는 죽었고 히아킨토스의 피는 넥타와 섞여 꽃으로 피어났다. 백합을 닮은 그 꽃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는데, 이 꽃이 ‘히아신스’다. 아폴론은 히아킨토스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 슬프다’라는 단어를 꽃에 새겼고, 그래서 지금도 히아신스에는 ‘AI AI’라는 아폴론의 절규가 적혀 있다고 한다.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역시 이 장면을 작품으로 남겼다. 화면 왼편에 쓰러진 히아킨토스를 바라보는 아폴론의 눈빛이 허망하다. 근처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서성인다.
마을의 소녀도 무슨 일인가 하고 따라나섰다. 죽은 히아킨토스와 슬퍼하는 아폴론 뒤로 반인반수 판(Pan) 조각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판은 아폴론과 음악 경쟁을 하는데, 아마도 원반 던지기를 하는 히아킨토스는 애정의 관계, 판은 경쟁의 관계를 표현한 듯하다. 장난꾸러기인 판의 모습은 바람을 일부러 불어 원반을 날아가게 한 제피로스의 모습과도 대조된다.
바람의 신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렇다면 위의 두 꽃을 탄생시킨 장본인인 바람의 신 제피로스(Zephyros)를 만나볼 차례다. 화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니 우리는 화가들이 그린 제피로스를 통해 바람을 볼 수 있다. 제피로스는 바람의 신 아네모이(Anemoi) 중 하나로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의인화한 신이자 바람을 다스리는 신이다.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티탄족의 하나인 아스트라이오스와 새벽의 여신 사이에서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북풍의 신 보레아스, 남풍의 신 노토스가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헤시오도스는 ‘서풍의 신’은 옷을 살랑거리게 만들고 가볍고 온난한 미풍을 상징한다고 했기에 흔히 봄을 재촉하는 봄을 알리는 신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아마도 제피로스를 표현한 작품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15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일 것이다.
작품의 왼편을 보자. 입에 바람을 한가득 머금고 불고 있는 신이 바로 제피로스다. 그가 바람을 부니 꽃잎이 날린다. 그를 안고 있는 여인은 꽃과 봄의 님프 클로리스(Chloris)다.
지금 제피로스는 비너스가 탄생하자 바람을 일으켜 비너스를 대지로 보내고 있다. 조개껍데기를 탄 비너스는 곧 대지에 도착해 제피로스의 아내이자 봄의 여신 플로라(Flora)에게 성대한 환영을 받을 것이다. 소설가 스탕달은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 여행 중 미술 작품을 본 후 순간적으로 황홀경에 빠져 호흡 곤란을 겪는다. 이로 인해 생긴 말이 바로 ‘스탕달 신드롬’이다. 미술 작품을 보고 호흡 곤란을 일으킬 정도라면 그 사람의 감각은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촉수가 많을지도 모른다. 가로가 3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작품 앞에 서면 8등신 누드의 여신이 마치 관객을 향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기분이 든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작년 12월에도 우피치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감상하던 한 남자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문득 바람을 가득 입에 불어넣은 제피로스가 관객을 향해 짓궂은 장난을 친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 올봄에는 야외로 자주 나가 서풍의 신 제피로스를 만나고 싶다. 봄바람에 모자나 머플러가 날아가버린다면, 바람의 신이 나타난 것이라 생각해도 좋겠다.
  • Sandro Botticelli / Birth of Venus / 1485|172.5×278.5㎝
  • 비너스의 탄생 세부 : 바람의 신 제피로스와 봄의 님프 클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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