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봄날, 꽃그늘에서 노닐다
태안 천리포수목원

라디오에서 가곡 ‘사월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천리포수목원을 떠올린다. 4월이 되면, 태안 천리포 바닷가
천리포수목원에 목련이 만발한다. 그곳에 가서 박목월의 시집을 품에 안고, 목련꽃 그늘에서 거닐고 싶어진다.
글. 김혜영(여행 작가 <주말여행 버킷리스트 99> 저자)
천리포수목원은 5월 초까지 목련을 볼 수 있다.
세계가 인정한 아름다운 수목원
바닷바람이 많이 부는 천리포수목원에는 봄이 더디 온다. 4월 무렵에야 목련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 이때부터 700여 종의 목련이 5월 초순까지 시차를 두고 피고 진다. 4월 중순쯤에 열리는 목련 축제 때 방문하면 비공개 구역인 목련원까지 관람할 수 있다. 평소 목련원을 개방하지 않는 것이 아쉽지만, 천리포수목을 아끼는 이에게는 일부 구역이라도 개방된 것이 고마울 뿐이다. 1979년에 개원한 천리포수목원은 2009년 3월이 되어서야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이전에는 ‘신의 비밀의 정원’으로 불리며 베일에 싸여 있었다. 천리포수목원이 개방되자 비밀의 정원에서 자란 목련 400여 종과 1만 3,000여 종의 수목들이 개원 30년 만에 세상에 드러났다. 전 세계에서 목련나무를 가장 많이 보유한 수목원으로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이듬해 국제수목학회에서 천리포수목원을 12번째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했다. 서해안 천리포 바닷가에 자리 잡아 자연 풍광이 뛰어난 것도 큰 몫을 했으리라. 현재 천리포수목원에 사는 목련나무는 700여 종에 이른다. 목련 외에 호랑가시나무류, 동백나무류, 단풍나무류, 무궁화나무류 등 특정 수종을 집중적으로 수집한 수목원으로도 이름나 있다.
달콤한 목련 향 한 모금
천리포수목원에 들어서면 짭짤한 바닷냄새에 달콤한 목련 향이 실려온다. 목련 향을 따라 해송이 늘어선 조붓한 산책로를 걷는다. 해송 숲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서 호수처럼 넓은 연못을 만난다. 연못 둘레에 무리 지어 피어난 수선화가 화사한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연못을 시계 방향으로 돌까,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까 잠시 망설이는 새 키다리 목련나무가 눈에 띈다. 이 목련나무를 좇아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걷기로 한다. 이 키다리 목련의 이름은 ‘벌컨’. 꽃송이가 크고 빛깔이 유난히 붉어 화산을 뜻하는 ‘볼케이노’와 불의 신인 ‘불카누스’에서 이름을 따왔다. 마침 벌컨이 만개해 나무에 홍등을 주렁주렁 걸어놓은 듯하다.
연못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본격적인 목련 구경에 나선다. 목련나무들이 겨우내 솜털 외투 안에 감춰뒀던 꽃을 선보이느라 분주하다. 활짝 펼친 꽃잎 모양이 별을 닮아 ‘스타워즈’인 진분홍빛 목련은 새색시인 양 새초롬하다. 발레리나처럼 생긴 흰색 목련의 이름은 별목련 ‘로얄스타’다. 하늘거리는 시폰 치맛자락이 연상되는 분홍빛 ‘아테네’는 이름처럼 신화 속 여신을 닮았다. 이외에 밀키웨이, 도나큰별, 빅버사, 스타브라이트, 얼리버드, 라즈베리 아이스, 베티 등 수많은 목련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백목련과 자목련만 알고 있었던 터라 목련나무에 걸린 명패가 딴 세상 이야기처럼 신기하다.
천리포수목원 방문 전에 점 찍어둔 목련은 꽃잎이 노란 황목련이다. 옐로버드, 골든걸, 로얄플러시, 엘리자베스 등이 그것. 붉거나 하얀 목련 사이에서 황목련의 고고한 자태가 돋보인다. 천리포수목원 창립자인 고 민병갈(Carl Ferris Miller, 1921~2002) 씨는 생전에 옐로버드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이 꽃을 볼 때마다 고 민병갈 씨의 생애를 되새겨본다.
한국에 귀화해 척박한 바닷가 모래 언덕에 씨앗을 심고, 일생을 수목원을 조성하는 데 바친 그의 삶은 목련 꽃말 ‘자연애’와 닮았다. 그는 그가 사랑했던 목련나무 아래 고이 묻혔다.
  • 천리포수목원 밀러가든의 큰 연못과 민병갈기념관
  • 낭새섬이 보이는 해변에 놓아둔 비치 의자
밀러가든 큰 연못의 포토존
신록이 눈부신 개심사 오전 풍경
차라리 길을 잃어도 좋을 꽃길
천리포수목원의 메인 구역인 밀러가든은 오릿길, 민병갈길, 꽃샘길, 수풀길, 소릿길, 솔바람길 등 여섯 가지 테마 산책길로 구성돼 있다. 오릿길은 큰 연못과 연못 뒤의 습지원 둘레를 연결한 길이다. 흰뺨검둥오리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생태계를 조성해 오릿길이라 부른다. 버드나무가 우거진 오릿길을 지나면 초가집 모양의 민병갈 기념관과 초가집 한 채가 있는 민병갈길에 접어든다. 이 초가집은 수목원 조성 전부터 있던 것을 보수해 게스트하우스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 전통 가옥을 사랑했던 고 민병갈 씨의 뜻에 따른 것이다.
억새원과 온실이 있는 소릿길을 지나 데크가 놓인 꽃샘길로 들어선다. 꽃샘길은 이른 봄부터 늦겨울까지 다양한 꽃과 열매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른 봄에 피는 풍년화를 시작으로 설강화, 벚꽃, 애기동백, 매화마름, 납매, 무스카리, 수선화 등이 수목원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바닥에 폭신하게 나무껍질을 깔아둔 수풀길에는 단풍이 고운 화살나무와 단풍나무가 많아 가을이 기대된다.
천리포수목원의 산책로는 대부분 흙길이다. 경사진 구간에만 데크를 놓아 자연미가 넘친다. 길을 잃어도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길이 구석구석 숨어 있다. 꽃길을 걷다 보면 편백나무가 우거진 숲길이 이어지고, 그윽한 숲길을 빠져나오면 해송 숲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데크 전망대에서는 천리포 해변과 암탉이 엎드려 있는 모양을 닮은 낭새섬이 손에 잡힐 듯하다. 하루에 두 번 바닷물이 빠지면 낭새섬까지 바닷길이 열린다. 낭새섬은 출입이 안 되어도 입구까지는 걸어갈 수 있다. 미리 물때를 확인해두면 좋다. 해송 숲 사이로 난 데크 산책로를 따라 바다를 친구 삼아 걷다 보면 나무 비치 의자가 나온다.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낭새섬을 바라보며 따스한 봄볕을 즐긴다. 천리포수목원은 내게도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기억될 듯하다.
200여 종의 튤립을 볼 수 있는 세계적인 튤립 축제
푸른 청벚꽃이 사는 천년 고찰
서산 개심사를 찾아가는 길은 늘 고즈넉하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가 우리나라 5대 사찰로 꼽을 만큼 유명한 곳이지만, 번잡함이 없다. 청아한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그윽한 솔숲을 지나는 동안 마음이 열린다. 다만 4월 중·하순에는 상춘객으로 경내가 붐빈다. 전각 주변에 심은 왕벚나무에 왕벚꽃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맺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절 주변은 꽃동산이 된다. 안양루 옆 해탈문 앞에 개심사에서 가장 우람한 왕벚나무가 산다. 가지가 주먹만 한 꽃송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수양버들처럼 축축 늘어진다. 늘어진 가지 끝에 서면 머리 위에 화관을 얹은 것처럼 보인다. 왕벚나무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지닌 나무가 있으니, 이름도 생소한 청벚나무다. 명부전을 지키고 선 아름드리나무로 우리나라에 한 그루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왕벚꽃이 대부분 흰색 또는 분홍색인데, 청벚꽃은 꽃잎 끝에 연둣빛이 감돈다. 빛깔 고운 천연 염색 스카프를 보는 듯하다.
왕벚꽃 하면 서산 도비산 자락에 있는 부석사도 빼놓을 수 없다. 개심사보다 덜 알려졌으나 1,300여 년 전에 창건한 고찰로 전해온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는 길 양옆에 왕벚나무가 줄지어 섰다. 연분홍 왕벚꽃 터널을 지나며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 한껏 들떠본다.
연분홍 왕벚꽃이 필 무렵이면 개심사는 꽃동산이 된다.
200여 종 튤립이 펼치는 봄의 향연
매년 4월 태안 안면도 꽃지해변 코리아플라워파크에서 태안 세계튤립축제가 열린다.
올해 8회째를 맞는다. 세계튤립축제라는 명성에 걸맞게 축제장 면적이 무려 11만 4,263㎡(3만 4,564평)에 달한다. 2년에 한 번 열리는 세계 튤립 정상회담인 WTS(World Tulip Summit)에서 2015년과 2017년에 세계 5대 튤립 축제로 선정된 규모 있는 축제다. 축제장에서 볼 수 있는 튤립은 무려 200여 종의 200만 송이. 점보뷰티, 옐로우스프링그린, 벤반잔텐, 키코마치, 발라다 등 생소한 튤립들이 저마다 미모를 뽐낸다. 이 중 ‘잿팟’이라는 자줏빛 튤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꽃잎 끝에 흰색 테두리를 둘러, 마치 흰 레이스를 장식한 자줏빛 벨벳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처럼 우아하다.
유채, 수선화, 히아신스, 리빙스톤데이지, 동백 같은 봄꽃도 더불어 화사한 봄빛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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